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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힐러리’ 이미지로 대중 사로잡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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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7면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확실시되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상원의원이 7월 출마선언 행사장에서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기도 한 크리스티나는 힐러리(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보다 강한 정치적 야심, 에비타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로 일찌감치 대통령이나 다름 없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AP 특약]

아르헨티나도 외환위기를 겪었다. 2001~2002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돈을 빌렸다. 국민의 60%가 빈곤층이 됐고 실업률은 30%로 치솟았다. 수퍼마켓이 털리고 실업자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했다.

아르헨티나 영부인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2003년 5월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57) 대통령이 위기를 극복했다. 임기 내내 연평균 8%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실업률은 8.5%로 떨어졌다. 모든 계층이 성장의 혜택을 골고루 입었다. 다음 대선에 출마해도 너끈히 당선되겠지만 후보직을 부인에게 ‘양보’했다.

키르치네르는 주지사 시절 주헌법을 1994, 98년 개정해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게 바꾼 바 있다. 이번에 양보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두 번째 임기에서 레임덕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4년 후 대통령으로 다시 복귀할 것이다”라는 시각이 있다. 심지어 “지금 곪고 있는 문제들이 곧 터질 것이기 때문에 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험한 말도 있다. 그가 정계를 떠난 것은 아니다. 창당해 분열된 페론주의자의 결집에 주력할 예정이다.

큰 이변이 없으면 국민이 ‘크리스티나’라고 부르는 영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54)가 28일 당선된다. 고도 성장이라는 남편의 업적이 있는 데다 야권은 분열돼 있다. 크리스티나는 40~50%대 지지율을 확보했다. 13명의 다른 후보 중에서 2~3위인 엘리사 카리오 전 하원의원과 로베르토 라바그나 전 경제장관은 10%대 지지율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선거법상 45% 이상 득표하거나 40% 이상 득표하고 2위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따돌리면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이 확정된다. 11월로 예정된 2차 결선 투표는 필요 없을 듯하다.

선거 구호는 ‘변화는 계속된다’이다. 남편의 정책을 계승해 그가 일으킨 경제적 변화를 심화시키겠다고 한다. 성장ㆍ고용ㆍ수출을 중시하는 기조가 유지될 것이며 수출 증대를 위해 약한 페소화를 유지할 것이다.

오로지 남편 덕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나 자신이 정계에 투신한 지 30년이 넘었고 95년부터 지금까지 12년간 상원의원직을 수행해 왔다. 매력과 활기와 지성 등 대통령직에 필요한 자질을 고루 갖추었다. 성격이 권위주의적이라 ‘크리스티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지만 크리스티나 자신이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방 언론은 그를 ‘라틴 힐러리’라고 부른다. 클린턴 부부처럼 키르치네르 부부도 75년 법대 재학 시절 처음 만났다. 남편이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고 상원의원인 부인이 대선에 나선다는 점에서 두 부부는 닮은꼴이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유명 정치인이 됐다며 자신과 힐러리를 차별화하려고 한다.

크리스티나는 에비타(에바 페론)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 에비타처럼 대중 연설 스타일이 전투적이다. 사망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영원한 국모다. 저소득층은 크리스티나에게서 에비타의 향수를 발견하고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이처럼 승리가 떼어놓은 당상이라 7월에 집권당 ‘승리전선’의 대선 후보가 된 뒤 국내 선거운동보다 외유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ㆍ스위스ㆍ독일ㆍ오스트리아와 중남미 국가들을 방문해 수뇌들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 국내 언론과는 인터뷰도 잘 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굳히기’ 식 선거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다. 선거 쟁점의 발생을 원천 봉쇄하고 산적한 문제 처리는 일단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착수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를 기다리는 가장 큰 난관은 인플레이션이다. 정부가 발표한 올해 물가상승률은 8~10%지만 실제로는 2~3배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최근에는 토마토 가격 폭등으로 수퍼마켓들이 토마토를 보이콧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후보 중 2위인 엘리사 카리오는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아르헨티나 경제가 경기 불황 중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한다. 집권이 문제가 아니라 집권 이후가 문제다. 재정ㆍ무역흑자 감소, 에너지 위기, 잔여 채무 협상을 다뤄야 한다. 크리스티나가 남편에 비해 경제에는 관심이 덜하다는 게 집권 후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크리스티나가 12월 10일 취임하면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일 것이다. 남편은 국제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고 외교상 결례도 자주 범했다. 크리스티나는 외환위기로 실추된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위상을 복원하려고 한다. 지난해 집권한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요청으로 힐러리와 크리스티나는 2003, 2004년에 만났다. 서방 언론은 이 두 여걸이 집권에 성공하면 미주 대륙의 국제관계가 대폭 바뀔 수 있다고 보도한다. 크리스티나는 특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등 라틴아메리카 신좌파와 미국 간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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