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할말은하자>15.몸사리는 경제단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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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4월초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중소기업 애로타개를위한 民官합동회의」는 시작부터 빚어진 돌출발언으로 시종일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컴퓨터판매협동조합을 대표해 참석한 梁昶植조합장이 당초 중소기협중앙회에 제출했던 對정부 건의 내용이 크게 달라졌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당초 案에는 실명제 후유증으로 회원사들이 겪는 자금애로등 민감한 문제등이 들어있었으나 정작 회의 석상에서는 지방세 감면문제등 개별업종별 한가한사안들만 제기됐다는 주장이었다.
中企協의 해명노력으로 어색한 분위기는 다소 가셨지만 참석한 中企대표들은 뒷맛이 개운치 않은 표정들이었다.
한 조합장은『건의내용 변질의 眞僞를 떠나 중소기업들의 對정부창구인 중기협이 회원들의 건의를 정부측에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의아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기협 관계자들은『조합들의 요구를 모두 정부측에 건의할 수는 없다』면서『사안의 완급정도에 따라 조율이 필요하며바로 이 때문에 중기협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구태의연한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여전히 정부 눈치보기에 급급한 경제단체들의「알아서 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게 많은 기업인들의 지적이다.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입바른 소리로「괘씸죄」에 걸리느니 차라리 회원사들의 불평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고 마는게낫다는 保身主義의 발로라는 이야기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정부와 일부 대기업그룹 회원사의 눈치살피기에 급급한 경제단체는 비단 중기협뿐만은 아니다.
다른 경제단체나 업종별 협회.조합도 별로 차이가 없다.
최근 全經聯이 공기업 민영화 방침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한정부발표에 앞서 자체 의견을 미리 마련해 놓고도 정부측 눈치를살피다 반대여론형성에 失機하고 만 것도 같은 맥락이다.
貿協이 자체 조사로 수출입실적등 통계치를 작성해놓고도 행여 정부측 입장이 다를까 노심초사,발표나 정보제공을 꺼린다는 사실은 회원사들이 익히 알고있는 관행이다.
P무역 J사장은『회원사들이 내는 무역특계자금으로 운영되는 貿協이 갖고 있는 정보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가하면 조선협회는 힘있는 대기업그룹 소속 회원사의 눈치살피기에 급급한 케이스로 꼽힌다.
매달 회원사들의 선박수주 순위를 집계해온 조선협회는 그동안 1,2위를 지키던 D조선.H중공업이 최근 S중공업에 추월당하자어쩐일인지 순위매김을 중단해 버렸다.
〈林峯秀기자〉 이들 각종 경제단체.협회.조합들이 회원사들의 정부나 정치권,힘있는 일부 대기업그룹의 동향에 민감했던 것은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다.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 단체의 재정자립도가 낮고 일부 임원진이 낙하산 인사로 자리를 차지해온데 있다 . 예컨대 중기협은 정부 재정의존도가 70%가량이고 무협은 정부가 걷도록 해준 무역특계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중견기업인 B實業의 L대표는 『돈줄을 쥐고 있는 정부에 맞서봐야 피해를 보는 것은 자신들 뿐이라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하다』면서『이 판국에 앞장서서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일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에 대한 일부 국민의 그릇된 인식도 경제단체들이 할말을 못하는데 한 몫을 해왔다.
돈이나 땅문제와 관련된 기업의 의견은 곧 부도덕한 것이라는 등식이 우리사회에 성립되고 있는한 경제단체등은 비록 정당한 요구라하더라도 입장표명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이런 점에 있어 일부 언론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게 기 업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들은 이제 회원사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만든 각종 단체들이 본래 취지대로 제목소리를 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연간 매출 5백억원대의 G상사 C사장은『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정당한 요구는 적절한 경로를 거쳐 수렴돼야 마땅하다』면서『기업도 우리가 지향하는 열린 사회의 구성원이며 기본적으로 기업의 성장발전 없이는 시장경제의 성공적인 정착은 불가능하다』고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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