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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기회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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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워싱턴의 한 세미나장에서 미국인 중견 기자를 만났다.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에서 일하는 토머스 오메스타드 선임 에디터였다. 그에게 “집권 가능성이 커 보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힐러리 클린턴”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버락 오바마의 추격은 김이 빠지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힐러리가 후보가 되면 대선에서 이길 확률은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그는 “공화당 후보들의 경쟁력에 문제가 있으므로 아주 높다”며 “힐러리는 누구와 상대해도 이기는 걸로 나온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힐러리는 대선 선두주자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그는 1, 2분기 정치자금 모금 실적에서 오바마에게 뒤졌지만 3분기 실적에선 1위로 올라섰다. 오바마가 각종 토론회에서 경험과 경륜 부족을 노출한 사이 힐러리는 안정감을 주는 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여기에 막강한 조직력,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중성을 활용해 당 내 경쟁에서 지지율 50%(워싱턴 포스트 10월 3일자)를 넘기에 이르렀다. 힐러리는 공화당 선두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과의 대결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상반기엔 줄리아니와의 가상 대결에서 늘 약세를 보였지만 이젠 7~8%포인트 앞설 정도로 분위기를 바꿔놨다.

힐러리는 상승세를 이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표를 열심히 모아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대세를 형성하겠다는 게 그의 전략이다. 그걸 나무랄 순 없지만 문제는 표를 얻는 방식이다. 비전 제시로 승부를 걸기보다 특정 집단에 영합해 표를 구한다면 대통령은 될지언정 청사에 훌륭한 지도자로 이름을 남기긴 어려울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예로 들어 보자. 힐러리는 8일 아이오와주 유세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혜택은 부유층에게만 돌아갔고, 노동자는 일자리를 빼앗겼다”며 “NAFTA를 조정해야 하며, 새로운 FTA는 보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6월엔 미국 최대의 노조연합인 AFL-CIO가 자동차 산업의 본거지 디트로이트에서 주최한 행사에 나가 “한·미 FTA는 우리의 자동차 산업을 해칠 것이므로 비준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1997년 아프리카 기업협회 연설에서 “지구촌을 보라. 무역장벽을 낮추는 국가가 그러지 않는 나라보다 번영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98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선 “NAFTA 덕분에 미국 내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NAFTA를 실현한 남편이 집권하던 시절 힐러리는 이처럼 자유무역의 전도사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워싱턴 포스트 등은 그 까닭을 노조의 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경선의 첫 관문인 아이오와에선 일부 강성 노조의 지지를 받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자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이 강세다. 그는 힐러리를 ‘남편을 추종하는 자유무역론자’로 낙인 찍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아이오와에서 힐러리를 꺾고 기선을 제압하면 대역전 드라마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속셈을 잘 아는 힐러리는 에드워즈의 예봉을 피하고, 노조의 마음도 사는 방편으로 반(反)FTA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런 변신은 소탐대실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노조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다수 대중이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힐러리는 남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빌 클린턴은 NAFTA를 지지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 AFL-CIO를 “포악무도하다(roughshod)”고 비난하며 강력히 맞서 싸웠다. 그의 단호한 리더십은 북미 경제에 큰 보탬이 됐다고 평가받는 NAFTA 출범의 토대가 됐다. 힐러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리더십과 안목이지, 기회주의적 처신이 아니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