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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클래식 음악의 메카' 뉴욕 카네기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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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4월 22일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는 뉴욕에서 런던으로 가는 여객선‘풀다’호를 탔다. 당시 52세였던 카네기는 6년간 교제 끝에 결혼한 아내 루이즈 위트필드(당시 30세)와 함께 자신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신혼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이 배에는 25세의 젊은 지휘자 월터 담로시(1862∼1950)가 타고 있었다.

담로시는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와 뉴욕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www.oratoriosocietyofny.org)의 음악감독을 맡은 지 3년이 됐다. 그는 여름 휴가를 이용해 한스 폰 뷜로(1830∼1894)에게 지휘법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가는 길이었다. 카네기의 부인 위트필드는 부유한 상인의 딸로 뉴욕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 합창단의 소프라노 단원으로 몇년 째 활동 중이었다.

항해 도중 카네기 부부와 담로시 사이에 깊은 우정이 싹텄다. 카네기는 뉴욕 오라오리오 소사이어티와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의 이사로 있었기 때문에 월터 담로시의 부친 레오폴드의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카네기는 담로시에게 지휘 공부를 마친 후 스코틀랜드로 오라고 초청했다. 이 세 사람은 Kilgrastron이라는 카네기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카네기는 담로시에게 뉴욕 최고의 콘서트홀을 지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사실 담로시는 그동안 뉴욕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콘서트홀에 대한 꿈은 1873년 뉴욕 오라토리오 협회, 1878년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를 창설한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담로시(1832∼1885)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당시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는 뉴욕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 비해 2류 교향악단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몇 개 안되는 홀을 대관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상주 오페라단의 시즌이 끝나는 여름에야 대관이 가능한데 그것도 뉴욕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런 다음 외국에서 뉴욕을 방문하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이 공연하고 그래도 남으면 심포니 소사이어티에게 대관을 주었다.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는 하는 수 없이 치커링, 스타인웨이, 크나베 등 피아노 회사들의 쇼룸(14번가)에서 연주할 수 밖에 없었다.

카네기는 1889년‘뮤직 홀 컴퍼니 오브 뉴욕’(Music Hall Company of New York)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2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도 내놓았다. 56번가와 57번가 사이의 한 블럭을 몽땅 사들여 사각형의 대지도 마련했다. 당시 주변 도로는 비포장 도로였고 센트럴 파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은 상당히 먼 업타운이어서 당시 도심에서 벗어나있는 교외로 여겨졌다. 근처에는 석탄 야적장이 있었고 연립주택 몇 채가 드문드문 자리를 잡았었다.

1890년 5월 13일 착공식에서 카네기 부인은 티파니 매장에서 구입한 은제 모종삽으로 머릿돌에 시멘트를 퍼부었다. 이 모종삽은 그녀가 평생 벽난로 위 선반에 두고 기념품으로 고히 간직했다.

공사는 7년이나 걸렸다. 당시 34세의 건축가 윌리엄 버넷 터실은 음향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마추어 성악가 겸 첼리스트출신으로 36년간 뉴욕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의 단원 겸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의 서재는 온갖 악보들로 가득했다. 터실은 카네기홀을 설계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1)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는 30.5m를 넘지 않는다 2) 메아리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최초의 반사음과 직접음의 시간차는 0.9초를 넘지 않도록 한다 3)잔향시간을 유지하기 위해 바닥을 제외한 부분에는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다. 건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다.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우아한 실내 장식이 눈길을 끈다. 로비 바닥은 대리석으로 꾸몄고 로비에는 조각 장식을 곁들인 기둥이 서 있다.

1891년 5월 5일 개막 공연을 앞두고 카네기홀 앞 도로는 마차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헨리 코트맨 포터 대주교가 봉헌사를 낭독한 다음 담로시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가 베토벤의‘레오노레 서곡 제3번’을 연주했다. 당시 미국 순회공연 중이던 차이코프스키가 무대에 올라 자신의‘장엄 행진곡’을 지휘했다. 음악회는 베를리오즈의‘테데움’으로 막을 내렸다.

건축가 터실은 건물이 많은 인파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지 은근히 걱정했다. 그는 불안한 나머지 연주회 도중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 사무실에 가서 건물 설계도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 봤다. 카네기홀은 개관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

카네기홀은 뉴욕에서 철근을 쓰지 않고 석재로만 지은 건물 중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그대신 건물 벽체는 매우 두텁게 처리했다. 카네기홀의 뛰어난 음향은 이 두터운 벽체에 기인한 바 크다. 원래의 이름은 ‘뮤직홀(Music Hall Founded by Andrew Carnegie)’이었다. 지금도 건물 외벽에는 그렇게 씌여 있다. ‘뮤직홀’은 특히 유럽에서 온 아티스트들에겐 클래식 콘서트 홀보다는 보드빌 무대를 떠올리게 했다. 노동자들이 술마시면서 대중적인 음악극을 즐기는 곳이다. 그래서 1893년 홀 이름을 그냥 ‘카네기 홀’로 줄이기로 했다.

1892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뉴욕 필하모닉 소사이어티가 카네기홀로 무대를 옮겼다. 뉴욕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 간의 격렬한 경쟁 관계가 16년 가까이 지속됐다. 1928년 결국 두 단체는 ‘필하모닉-심포니 소사이어티 오브 뉴욕’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됐다. 현재도 ‘뉴욕 필하모닉’의 공식적인 이름은 ‘필하모닉-심포닉 소사이어티 오브 뉴욕’이다. 1925년까지 이 홀은 카네기 일가의 소유였다. 1925년 카네기의 미망인은 이 건물을 부동산 개발업자 로버트 사이먼에게 팔아 넘겼다. 사이먼은 카네기 부인에게 앞으로 5년간은 건물을 해체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1935년 사이먼이 죽자 그의 아들 로버트 사이먼 주니어가 소유권을 넘겨 받았다. 처음엔 카네기홀 운영으로 제법 돈을 벌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 운영이 어려워졌다. 사이먼은 뉴욕 필하모닉에게 카네기홀을 400만 달러에 매각하려고 했다. 당시 뉴욕필은 카네기홀 상주 단체로 있으면서 연간 가장 많은 공연 일수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이미 신축 중인 링컨 센터로 가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때 뉴욕필은 링컨 센터가 카네기홀보다 훨씬 좋은 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시로서는 뉴욕에 대규모 콘서트홀이 두 개씩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카네기홀의 주고객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한 사이먼은 카네기홀 건물을 팔기로 결심한다. 상업 용도로 개발하려던 부동산 업자와의 계약을 체결하고 만다.

1957년 9월 9일자 ‘라이프’지는 야단스럽게 붉은 색깔을 입힌 괴물같은 44층짜리 빌딩의 설계안을 실었다. 1960년 뉴욕필이 마침내 링컨센터로 옮기고 나서 건물은 헐릴 위기에 놓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카네기홀 수호 대책 위원회’(Commitee to Save Carnegie Hall)를 결성했다. 상원의원 맥닐 미첼 등도 가담했다. 카네기홀 앞에는 대형 불도저가 대기 중이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서명에 참가했고 기부금도 내놓았다.

뉴욕 시 당국은 사이먼에게 카네기홀을 5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했다. 1960년 5월 16일 비영리회사인 카네기홀 코퍼레이션이 출범해 카네기홀을 운영해오고 있다. 초대 극장장은 아이작 스턴이 맡았다. 스턴은 1986년 카네기홀 개관 100주년 기념 개보수 공사를 위해서도 5000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았다. 카네기홀의 메인 홀은 1997년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으로 명명됐다.

아이작 스턴은 생전에 카네기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네기홀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악기다. 연주를 그대로 전달해주고 때로는 실제보다 더 과장해 보여준다.”연주를 잘 하면 더 잘한 것처럼 들리게 하고 연주를 망치면 아주 못하는 것처럼 들리게 한다는 얘기다. 연주자들이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카네기홀은 3개의 빌딩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메인 홀, 두번째는 스튜디오, 리사이틀홀, 회의실이 있는 부속 건물, 하나는 두 빌딩 사이에 끼어 있다.

카네기홀은 1964년 국가문화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고 1991년 뉴욕 100년사 협회에서 주는 금메달을 수상했다. 카네기홀이 없는 뉴욕은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1986년 7개월간의 개보수 공사로 카네기홀에 엘리베이터가 처음 설치됐다. 그전까지는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의 맨 꼭대기층까지 가려면 105개의 계단을 거쳐야 했다. 에어컨을 설치해 무더운 7∼8월에도 음악회를 열 수 있게 되었다. 메인 홀의 의자, 카페트, 바닥, 무대 바닥도 전면 교체됐다. 공사가 끝난 다음 음향이 더 나빠졌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개보수 공사 책임자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음향에 대한 불만은 9년간이나 계속됐다. 1995년 무대 아래의 콘크리트 슬라브에 서 문제를 발견했다. 슬라브는 곧바로 철거됐다.

1987∼89년 같은 블럭에 카네기홀 바로 옆에 ‘카네기홀 타워’라는 이름의 60층짜리 사무실 빌딩이 세워졌다. 새로운 백스테이지 공간과 연회 공간이 이 빌딩 안에 만들어져 카네기홀 건물과 연결되었다.

1891년 메인 홀과 함께 문을 연 와일 리사이틀 홀은 카네기 홀의 의장 샌퍼드 와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상 3층에 위치해 있다. 1891년 개관 당시에는 ‘체임버 뮤직 홀’(나중에 카네기 체임버 뮤직 홀)이었다가 1940년대 말‘카네기 리사이틀 홀’로 이름을 바꿨고 1986년에 와일 리사이틀 홀이 되었다. 독주회와 실내악, 심포지엄, 매스터 클래스 등이 열린다. 카네기홀 아카이브에는 1만 2000점이 넘는 프로그램, 카네기홀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진과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2003년 9월 문을 연 잔켈홀(644석)은 카네기홀 부이사장인 주디 잔켈과 아서 잔켈 부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까지 영화관으로 사용되오던 것을 실내악 전용홀로 개조했다. 현대음악, 소극장 오페라, 재즈, 시낭송회, 멀티미디어 공연, 렉처 콘서트, 레코딩 장소로 적격이다. 1891년 개관했을 때는 단순히‘리사이틀 홀’이었다. 1896년 리노베이션 이후 카네기 리세움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1898년에는 미국 연극예술아카데미에 무대를 넘겨줬다가 1959년에는 영화관이 됐다. 지하에 있기 때문에 지하철이 지나갈 때는 미세한 진동이 느낀다는 불만이 있지만, 정작 지하철과의 거리가 불과 61㎝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연주 도중에도 들린다. 무대를 객석 중앙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한 가변형 무대가 특징이다.

2003년 6월 뉴욕 필하모닉은 2006년부터 카네기홀로 무대를 옮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욕 필하모닉과 카네기홀이 합병해 카네기홀을 운영하자는 생각이었다. 평론가들도 뉴욕필이 카네기홀이 아닌 링컨센터 에이버리 피셔홀에서 연주하는 것에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표시해왔다. 하지만 카네기홀 측에선 이 제안을 거절했다. 뉴욕필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훌륭한 교향악단이 이곳을 찾기 때문이다. 개관 첫 시즌의 음악회는 50회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연간 800회 이상의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카네기홀은 전세계 음악가들이 그리는 ‘꿈의 무대’다.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카네기홀 데뷔에 성공해야 한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카네기홀과 가던 도중 어떤 행인이 그에게 길을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카네기 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습하세요(Practice)”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반주로 독주회를 하던 도중 악보를 놓치고 말았다. 크라이슬러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쯤 있는거야?” “카네기홀에 있지.”
참고로 스코틀랜드 던펌라인에 ‘카네기 홀’이라는 공연장이 있다. 앤드루 카네기가 돈을 기부해 지은 홀이다. 피츠버그에도 ‘카네기 뮤직 홀’이 있다. 역시 앤드루 카네기가 지은 것인데 카네기 박물관, 피츠버그 카네기 도서관 메인(오클랜드) 분관과 함께 있다. 하지만 둘 다 뉴욕 카네기홀에 비해 규모도 작고 덜 유명하다.

◆공식 명칭: Carnegie Hall

◆홈페이지: www.carnegiehall.org

◆개관: 1891년 5월 5일(재개관 1986년 12월 15일)

◆건축가: 1891년 윌리엄 버넷 터실(William Burnet Tuthill), 1986년, 1989년 James Polshek

◆음향 컨설턴트: 1986년 Abraham Melzer, 1989년 Kirkegaard and Associates

◆객석수: Isaac Stern Auditorium / Ronald O. Perelman Stage 2804석, Joan and Sanford I. Weill Recital Hall 268석, Judy and Arthur Zankel Hall 644석

◆초연: 드보르작‘신세계 교향곡’(1893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정 교향곡’(1904년), 거슈윈‘피아노 협주곡 F장조’(1925년)‘파리의 아메리카인’(1928년), 라흐마니노프‘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1931년), 바레즈‘덴시티 21.5’(1936년), 바르톡‘콘트라스트’(1939년), 쇤베르크‘실내 교향곡 제2번’(1940년)‘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찬가’(1944년), 브리튼‘교향적 레퀴엠’(1941년), 힌데미트‘베버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1944년), 스트라빈스키‘3악장의 교향곡’(1946년), 아이브스‘교향곡 제3번’(1946년)‘교향곡 제2번’(1951년)‘교향곡 제4번’(1965년), 번스타인‘캔디드 서곡’(1957년), 존 코릴리아노‘오보에 협주곡’(1975년), 윤이상‘플룻 독주를 위한 피리’(1988년)

◆상주단체: 카네기홀 재즈 밴드

◆부대시설: 카네기 홀 아카이브(1986년), 로즈 뮤지엄(1991년)
⊙로즈 뮤지엄(2층) 154 West 57th Street 입구 이용
오전 11시-오후 4시30분, 연주 전 30분, 중간 휴식. 여름철에는 휴관. 입장료 무료.
⊙시티그룹 카페(parquet level) : 공연 전 1시간, 중간 휴식 때. 샌드위치, 커피, 디저트, 칵테일, 샴페인, 퓨전 아시아 메뉴
⊙ Klaus Jacobs Room (와일 리사이틀 홀 옆): 음료와 가벼운 디저트. 공연전 1시간, 중간 휴식 시간
⊙잔켈 홀 바: 가벼운 음식과 음료. 잔켈 홀 바깥 Parterre level

◆기념품 점: 2층 로즈 뮤지엄 옆. 154 West 57th Street 입구로
오전 12시-오후 4시30분. 연주 전 30분, 중간 휴식 때 영업. 인터넷 구매도 가능

◆주소: 154 W 57th St at Seventh Ave, New York

◆교통: 지하철 A, C, B, D, 1, 9 (59th St-Columbus Circle 역), N, R 57th St. 역

◆입장권: 20∼70달러

◆전화: +1 212-247-7800

◆가이드 투어: 평일 오전 11시30분, 오후 2시, 3시 출발. 티켓은 매표소에서 월-금 판매. 1시간 소요. 메인 로비에서 출발. 성인 9 달러, 학생/노인 6달러, 12세 이하 3달러.

◆매표소: 57th Street and Seventh Avenue. 월-토 오전 11시-오후 6시, 일 오전 12시-오후 6시. 공휴일은 쉼. 여름철에는 월-금 오전 11시-오후 6시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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