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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칼럼

“인민은 위대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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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지난 10월 4일, 방북단이 서해갑문을 찾았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며칠 동안 고였던 방북 인상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민은 위대하다’. 전날 치렀던 정상회담의 긴장이 사라지고 기대치를 넘는 성과를 얻어낸 터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인한 협력사업 허락서를 남한 국민에게 보란 듯이 풀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외교적 치사는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글귀가 목구멍에 꼴깍 넘어가기는 했다. 그런데 소화불량에 걸린 듯 껄끄러움이 신경을 건드렸다. ‘인민은 위대하다’는 말이 남한의 ‘국민 정체성’과 부딪혀 작은 동요가 일어났던 것이다.

칠흑 같은 평양의 밤, 풀 한 포기 피워내지 않는 논두렁, 붉은 산과 초라한 덤불, 무너진 담, 찌그러진 창문. 2년 전 필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각인되었던 장면에 19세기풍으로 걸음을 옮기는 초라한 행색의 북한 인민들을 떠올리면 끈질긴 삶의 휴머니즘 앞에서 ‘인민은 위대하다’고 해도 부족할 터이다. ‘아리랑’이 자아낸 역사적 승화감과 서해갑문 대역사에 흘린 인민의 땀이 ‘민족’이라는 생리적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인민주권’이 되고, ‘위대한 인민’이 되었다. 바로 이 ‘생물학적’ 민족 영역에서만이 인민과 국민이 아무런 유보조항 없이 만나왔음을 깨닫는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방북단의 태도·표정·발언들을 보면 정치적·역사적·생물학적 민족 개념이 서로 뒤섞여 그들조차 헷갈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포용정책이 역사와 정치적 정체성까지 퍼주는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체제 분단의 피 묻은 경계선 위에 남북 정상이 위태로운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민족 개념이 허용한 작은 공간 때문이다. 햇볕정책도 포용정책도 남한의 국민 정체성을 일단 유보하고 비무장지대에 뛰노는 노루 가족 같은 종족 개념으로 평양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민은 여전히 ‘반제 투쟁의 전사’임을 환기시킬 때 남한은 당황한다. “벽을 느꼈다”는 노 대통령의 고백에는 어떤 협의사안도 ‘정치화된 민족’ 개념에 부딪히면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반면 ‘자연사적 의미’, 즉 종족과 가까운 의미로 쓰일 때 그런 대로 쓸 만한 합의점이 도출되곤 했다. 이산가족 상봉, 백두산 관광, 응원단 동시 탑승은 모두 이런 생물학적·자연사적 민족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꽃게에 국적이 없다고 하면 서해 북방한계선(NLL)도 아무 탈이 없지만, 법적 근거를 따지고 누가 그었나를 묻는 순간 문제가 꼬인다. 말하자면 ‘탈정치화된 민족’에 한정된 남북관계가 지금까지 북한이 허용한 협애한 통로이다. 이 통로를 따라 기회구조를 넓히려는 남한의 진보세력은 ‘민족’에서 남한 정체성을 바꾸거나 버릴 것을 주장했는데, 그것이 보수세력에는 비난의 호재였다.

그러니 노 대통령도 이 위험천만한 문장을 쓰면서 북한적 개념에 대한 약간의 긴장을 느꼈을지 모른다. 오늘날 지구촌을 휘감는 ‘제국주의 폭풍’을 전면 거부하고 독자생존을 독하게 고수하는 ‘유격대국가’에서 인민이란 휴머니즘적 인간이 아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임화의 ‘인민항쟁가’처럼 반제 투쟁의 당위성을 각성한 사람이 인민이고, 그런 사상이 주체철학이다. 따라서 주체와의 일체감이 ‘위대한 인민’의 전제이며, 선군정치는 인민과 주체를 일체화하는 촉매다. 그렇다면 ‘인민은 위대하다’는 문장은 평양에서는 ‘주체는 위대하다’로 악용될 수도 있다. 종족적 개념이 역사적·정치적 인민 개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아무튼 ‘인민은 위대하다’에서 ‘인민’은 북녘의 역사를 운명으로 알고 운 없게도 수령체제에 던져져 살아가는 동일 종족으로서의 북한 동포를 지칭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오후 회담에서 허리띠 풀고 이런 일차원적 개념으로 접근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호기가 자극되었고, 그래서 ‘말이 좀 통합디다’로 회담을 끝낼 수 있었다. 탈정치화된 민족 개념, 이것이 남북관계를 지탱하고 지평을 확장하는 연결고리이지만, 제국주의의 파고 속에서 유별난 민족주의를 고수해온 한국의 국민이 극도로 정치화된 남한 정체성을 어느 선까지 양보할지는 의문이다. 이 점이 다음 정권에서 또 한 차례의 격렬한 이념 갈등을 예고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