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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실체와실태>中.88~90년 전성기 半공개적 확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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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만나자 판문점에서.』 6共 초기인88년3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민족해방운동(NL)계열의 金重基씨(당시 철학4)가 南北청년학생회담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며 제시했던 구호다.
마치 4.19직후 남북대학생회담운동을 연상시키는 이 구호는 빠른 속 도로 전국으로 확산돼 당시 대학가를 「북한붐」에 휩싸이게했다.
이는「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이어져 전국 주요대학 캠퍼스에서는『꽃파는 처녀』『소금』등 북한영화가 상영됐고 축제때 공연된 마당놀이.탈춤등엔 북한의 혁명가극『피바다』의 일부장면이 삽입되기도 했다.
주체사상은 이 시기를 틈타 학생운동권 사이에 광범위하고도 반공개적으로 퍼져나갔다.
「남북학생회담투쟁」은 87년12월 대통령선거전에서의 분열과 패배로 인해 한동안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침체 국면에 빠져 있던 학생운동권의 새로운 이슈로 등장했으며 이를 계기로「주사파」는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초기 주사파들은 청계천에서 구입한 단파라디오를 통해 자취방에몰래 숨어청취한「구국의 소리」방송을「민주학우」명의의 대자보로 전파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이 무렵에 와선북한방송 내용을 편집한단행본이 공공연히 출판돼 많은 학생들이 쉽게 접할수 있었다.
당시「구국의 소리」방송은「한국민족민주전선」명의로 방송돼 남한내 지하방송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황해도 해주 근방에서 송신되는 것으로 공안당국이 밝혀냈다.
「구국의 소리」방송에 나오는 운동강좌나 사상강좌는 주사파가 주류를 이루던 전대협의 투쟁방침으로 그대로 굳어졌다.
『조선통사』등 북한 원전 1백여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이틈에 『주체사상총서』『김일성저작선집』따위의 책들도 서점진열대를 비집고 들어와 운동권학생들의「교과서」구실을 했다.
각 학과나 서클단위 토론회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논전도「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인용한 주사파 학생의 발언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사파가 아니면 운동권에서 발붙이기 힘들었고 대학가의 모임이나 토론에서도 당당히 발언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전대협이나 학생회 명의의 공식문건에는「자주사상」등의 용어로 우회적으로 표현됐으나 주사파의 한 분파였던「반제청년동맹」은 89년3월 결성선언문을 통해『주체사상은 이미 공인된 시대의 사조로 되었으며 그 후광아래 반미자주화의 기세찬 투쟁 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주장해 자신의 사상적 기반이 주체사상임을 분명히 했다. 은연중에 북한식 용어들이 운동권학생들의 일상언어속에 파고들어 성명서등 유인물에는 「영웅적」「불퇴전」「철천지원수」「열혈청년」등의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89년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평축참가투쟁」을 벌이던 무렵에는 공식대회가인 동요풍의『청년학생축전가』가 대학가에서 대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林秀卿양의 평양방문을 절정으로 주사파의 위세는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東歐 공산권 붕괴로 인한 운동권 전반의 혼란과 「공안정국」이라 일컬어진 6共정부의 대대적인 반격속에서 많은 핵심 주사파들이 검거되고 방북투쟁의 성과를 두고 벌어진 사상투쟁을 계기로 일어난 내부 분열이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민족해방인민혁명론」은 따르되 주체사상의 「수령관」과 「후계론」은 받아들이지 않는 「NL좌파」가 생겨나고 민중민주(PD) 계열의 운동권 학생이 정연한 이론 전개를 바탕으로득세하면서 주사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된다.
91년 대학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88,89년과 달리 주사파들이 대거 낙선하는 이변을 낳았고 이러한 추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공안당국은 주사파의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배출된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재야단체및 노동계등에 파고들어 지금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芮榮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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