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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선언의 다섯 가지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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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먼저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이 2005년 9·19 공동선언을 본질적으로 재확인하는 데 그친 비핵화 문제에 관심이 쏠린다. 노무현 대통령은 2·13 합의와 관련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압박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 경제협력과 비핵화 문제를 분리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남북 화해가 중요하지만 핵 문제 협의와 분리할 수 없다’는 북·미 공동성명과 협약을 부정한 셈이다. 만약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무기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폐기 선언을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9개쯤 되는 핵무기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영변 핵 폐기도 중단한 뒤, 국제 원조를 얻고 제재를 해제받으려 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2007 남북 정상선언은 그런 위험한 시나리오를 막을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둘째 관심사는 ‘남과 북은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제2항의 둘째 문장이다. 이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노 대통령이 합의하고, 2005년 11월 경주 한·미 정상선언에서 중요하게 언급했던 북한 인권의 중요성을 노 대통령이 은근히 부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이 헌장 초안에서 ‘내정 불간섭’ 원칙을 거부하는 대신 독재정권 아래 있는 미얀마 국민의 인권이 중요하다는 선언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 아시아의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은 이번 남북 정상선언으로 그동안 쌓아 올린 민주주의 성과에서 후퇴하는 셈이 되지 않을까.

셋째는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한다’는 제3항의 셋째 문장이다. 이 내용은 평화에 대한 위협이 제3자인 미국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되풀이해온, 오직 그들만이 북한을 공격하려는 워싱턴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한·미동맹에 해를 끼치고 현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화술이다.

넷째 관심사는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제4항에 관한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발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6자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합의문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을 재확인한 것은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남과 북은 미국이나 중국까지 포함해서 함께 협력해 나가기로 한다’는 부분을 보면 평화조약에 서명하기 전에 비핵화에 분명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강조를 노 대통령이 공공연히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물론 버락 오바마 이외의 어떤 대통령 후보도 비핵화 이전에는 결코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경제협력 프로젝트와 경제특구 확대라는 거대한 선물 꾸러미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북한이 인민에게 권력을 주고, 시장 메커니즘과 한국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고, 6자회담에서 정한 단계를 따라준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이들 합의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선언의 세부 항목 어디에도 이와 관련된 언급이 없다.

남북 정상선언에 이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워싱턴이 배신감이나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남북 정상선언의 이행 여부는 한국의 다음 정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현재로선 부시 행정부 스스로도 골칫거리가 많아 서울과 또 다른 문제를 만들 여력이 없다. 여러 면에서 남북 정상선언은 구속력을 가진 국제합의라기보다 한국 내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워싱턴과 서울의 다음 행정부는 남북 화해, 비핵화, 한·미동맹 등의 과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풀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정리=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