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칼럼

벙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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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벙커는 골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설에 따르면 골프는 스코틀랜드 목동들이 초원에서 양을 치기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을 막대기로 장난 삼아 후려친 것이 우연히 초원에 뚫려 있던 토끼 굴로 들어가게 돼 골프로 발전한 것이다.

양들이 풀을 뜯던 넓은 초원은 오늘날 잘 정비된 페어웨이가 됐다. 토끼가 풀을 뜯어먹던 토끼 굴 주변은 그린이 됐고, 굴러다니던 돌멩이들은 골프공이 됐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돌멩이를 후려치던 막대기들은 잘 계산된 여러 개의 골프클럽으로 발전했고, 토끼가 살던 굴들은 오늘날 펄럭이는 깃발이 꽂혀 있는 직경 108㎜의 홀이 됐다.

이때 양치기들이 토끼를 잡기 위해 함정을 만들거나 찬바람이 불 때 양들을 일시적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판 것이 골프장의 벙커로 진화한 것이다. 벙커는 오늘날 모든 골프장에 만들어져서 골퍼들로 하여금 절제된 힘으로 공을 치도록 강요하고 있다.

벙커에 빠진 공을 탈출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샌드 웨지는 1932년 미국의 진 사라젠에 의해 고안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푼(spoon)이라는 골프클럽이 있었지만 미국골프협회 등에서 불법으로 판정돼 곧 사라졌다. 그 뒤 사라젠 자신이 고안한 샌드 웨지를 사용, 1932년에 브리티시 오픈과 US 오픈에서 우승을 하자 급속히 대중화됐다.

모래 위에, 혹은 모래 속에 묻혀 있는 공을 클럽을 사용해 탈출시키는 일은 초보자는 물론이고 프로들에게도 난감한 일이다. 골프에서 클럽으로 공을 직접 임팩트하지 않는 방법으로 공을 날리는 것은 벙커샷뿐이다. 벙커에서 공은 어떤 원리로 떠오를까? 여기서도 과학의 원리가 힘을 발휘한다. 샌드 웨지의 로프트 각은 약 54∼56도로 다른 아이언보다 각이 크고 스윙웨이트 값도 피칭 웨지보다 2 내지 5단계 크다. 샌드 웨지의 헤드는 모든 아이언 중에서 제일 크다.

샌드 웨지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의 용어를 알아야 한다. 솔은 주로 아이언 헤드의 지면을 향하는 밑바닥을 말하고 리딩 에지(leading edge)는 솔의 앞날을 말한다. 솔 각은 지면과 리딩 에지 사이 각을, 솔의 크기는 목표 선을 향하는 솔 바닥 면의 너비다. 바운스(bounce)는 지면으로부터 리딩 에지까지의 높이를 의미한다. 바운스는 솔 각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만 솔 각의 크기는 같으나 솔의 모양에 따라 바운스의 크기가 같은 경우도 있다. 솔 각과 바운스는 임팩트하는 초기에 공을 얼마나 쉽게 띄우느냐 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공이 놓여 있는 상태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일반적인 솔 각의 크기는 10∼14도다. 그러나 모래가 아주 부드럽거나 러프(rough)가 깊으면 14도 이상의 솔 각을 사용하고 딱딱한 모래인 경우 0∼10도의 솔 각을 사용한다.

벙커 탈출은 헤드의 이런 특성을 이용해 샌드 웨지로 벙커에 있는 공의 뒤쪽 3∼5㎝ 지점을 임팩트한다. 헤드가 다운스윙 궤도를 따라 내려와 모래를 파고드는 순간에 면적이 큰 솔과 모래의 반작용에 의해 헤드는 미끄러지면서 위로 튀어 오른다. 즉 헤드는 모래와 솔의 충돌로 모래가 없을 때의 스윙 궤도를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약간 위쪽의 궤도를 따라 회전하게 된다.

이런 원리로 샌드 웨지는 모래와 함께 공을 탈출시킨다. 과거에는 모래를 깊게 많이 퍼내는 익스플로전(explosion) 샷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샷은 손목이 약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어렵다. 최근에는 샌드 웨지를 이용해 클럽페이스를 오픈시키고 솔의 바운스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즉 모래를 많이 파지 않고 살짝 떠내는 스플래시(splash) 샷이 더 많이 사용된다.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벙커가 있으니 자신만의 샌드 웨지로 탈출을 시도해 보자.

김선웅 고려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