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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브라보, 마이 세컨드 라이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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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보면, 마음에 드는 일 만나면 눈이 번쩍 뜨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인가 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들. 하나같이 눈이 맑다. 왼쪽부터 최준영씨, 최해숙씨, 이경훈씨 부부.

‘세컨드 라이프’가 화제입니다. 노후 인생 얘기가 아닙니다. 2003년 문을 연 미국 린든 랩 사의 가상현실 사이트(www.secondlife.com) 얘기입니다. 전 세계 1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성(性), 다른 국적,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이곳에서 ‘제 2의 인생’ 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어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고요.

 한편으론 재미있지만 한편으론 씁쓰레합니다. 아무리 현실 뺨친다 해도 그곳은 가상세계 아닙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린다는 건 일종의 ‘욕구불만’ 아닌가 합니다. ‘또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은 있지만 현실에선 엄두가 안 나니, 대신 가상세계로 달려가는 가는 거 아니냐는 얘깁니다.

 내 삶의 진짜 ‘세컨드 라이프’, 그저 꿈일까요. 현실의 벽은 정말 높고 단단할까요.

 여기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하려 괜찮은 ‘퍼스트 라이프’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대학로에서 배를 깎는 전직 교수가 있습니다. 건설회사 그만두고 소 키우는 재미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와인 전도사’가 된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이들이 입 모아 말합니다.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져요.”

글=김한별·홍주연·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어, 여기 카페가 아니에요?” “카페는 아니지만 쉬었다 가세요. 천천히 배 구경도 하시고요.” “야, 정말 배가 있네~.”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옆 골목. 한 바비큐 체인점 지하 올리버 보트(oliberboat.com, 010-6332-6353)엔 오늘도 ‘길 잘못 든’ 커플이 찾아왔다. 장난감 배로 장식한 테마 카페인 줄 알았단다. 하기야 대학로 한복판에 ‘진짜 배’를 만드는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올리버 보트는 ‘진짜 배’를 만드는 곳이다. 그것도 일일이 나무를 켜고, 썰고, 두드려 만드는 목선이다. 16~18피트짜리 카누·카약이 ‘주력 상품’이지만 20피트가 넘는 낚싯배도 만든다. 이곳의 ‘선장’ 최준영 대표는 원래 배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다. 불과 2년 전까지 톱과 대패 대신 마우스·타블렛 팬(디자이너들이 애용하는 펜 모양의 컴퓨터 입력도구)을 쥐고 살았다. 2005년 8월까지 삼성전자에서 운영하는 삼성 아트&디자인 인스티튜트(SADI)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가르쳤다. 2002~2003년엔 유명 디자인 회사 이노디자인에서 이사로 있었다. 바닷가 출신도 아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배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인생이었다.

뒤집어 놓은 배의 선을 보고 전율했다

교수 → 보트 제작자 최준영씨

 

운명은 우연찮게 찾아왔다. 어린 시절 우연히 놀러 간 바닷가. 물기를 말리기 위해 뒤집어 놓은 배에서 전율을 느꼈다. ‘세상에 배처럼 아름다운 건 없다.’ 그 전율에 내내 붙들려 살았다. 미국 유학 시절에도, 영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도 배를 잊지 못했다. 결국 1997년 삼성에 들어가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평생 배를 만들며 살겠다.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꼭 배로 세컨드 라이프를 시작하겠다”고.

 2005년 기회가 찾아왔다. 일하는 틈틈이 준비한 선박 연구 계획이 산업자원부 ‘차세대 디자인 리더 지원 대상’으로 뽑혔다.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망설임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정된 직장에 대한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아내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얼굴에 손톱자국 좀 났다’고 한다. 결국 아내도 그의 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배가 좋다니, 그 좋아하는 배를 만들며 나머지 인생을 살겠다니, 말릴 재간이 없다”고 했다.

 1년 반을 공부하고 돌아온 지난 4월, 올리버 보트를 열었다. 전업 보트 빌더(Boat Builder)가 그의 새 직업이다. 올해 나이 딱 마흔. 스스로에게 약속한 세컨드 라이프의 약속을 멋지게 지켰다. 왜 하필 나무 배, 왜 하필 대학로였을까? “플라스틱(FRP) 선박과 달리 목선은 사람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어요. 나무가 허용하는 곡선 안에서만 배를 만들 수 있죠. 배를 만들며 겸손을 배우고 자연을 배워요. 젊은이들이 생활 주변에서 쉽게 나무배를 만나고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지요.”

 올리버 보트의 배는 싸지 않다. 모두 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수입 플라스틱(FRP) 배의 3분의2 값이지만, 카누가 대당 600만~800만원, 카약은 1000만원에서 1200만원 한다. 웬만한 직장인도 선뜻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 돈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배를 사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대신 ‘직접 배를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재료비 100만~150만원에 한 달 수강료 60만~80만원씩 넉 달이면 누구나 자기 배를 가질 수 있단다. “배는 물 위에 짓는 집과 같아요. 내 손으로 만든 내 집을 띄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뿌듯한 줄 아세요?” 개업 다섯 달 만에 다섯 대를 팔았지만, 그는 배보다 ‘배 문화’를 파는 데 열심이다. 내년 개교를 목표로 서해안에 선박학교를 준비 중인 것도 그 때문이다.

 최 대표는 매일 배를 만든다. 주문이 있을 땐 주문 받은 배를, 주문이 없을 땐 자기만의 배를 만든다. 올리버 보트엔 언제나 삼나무 톱밥 냄새가 은은하다.

김한별 기자

나이 들어 공부하니 짜릿했다. 행복했다

디자이너 → 소믈리에 최해숙씨

 

35세. 현실에 안주하기도 모험에 도전하기도 망설여지는 나이에 와인나라 최해숙(41) 팀장은 이탈리아로 떠났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뒤 섬유 디자이너를 거쳐 LG화학에서 인테리어 소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였다. 1990년대 말 직장 생활 10년이 넘어가면서 ‘세컨드 라이프’를 꿈꿨다. “내 자신이 고갈되는 느낌이었고 재충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무엇을 할지 몰라 결심을 못했죠.”

 늘 그렇듯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0년, 아는 후배가 요리 코디네이터로 잡지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요리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무조건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새로운 일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외국 잡지를 보며 공부하고 남대문 시장을 뒤져 접시를 샀다. 요리를 예쁘게 꾸며 잡지에 내놓고 나니 이 분야를 제대로 파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유학을 결심했다. 원룸의 전세금을 빼고 퇴직금까지 보태 ‘실탄’을 마련했다. 물론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무모한 도전이야.” “지금 가면 결혼은 어떻게 하고.” “좋은 경력을 왜 버려.”…. “겁이 났죠. 경제적으로 부담도 됐고요. 가만히 마음의 소리를 들었어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1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요리 학교에서 두 달 수업을 마쳤고, 그 지역 레스토랑에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30대 중반에 시작한 견습 생활은 혹독했다. 레스토랑에서 먹고 자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냉동 새우를 손질하고 파스타 반죽을 만들었다. 접시와 칼 등 요리 도구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종일 서서 일해서인지 밤이 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3개월이 지나자 레스토랑에서 월급을 받았고 접시를 만지는 것도 허락됐다. 점차 일에 익숙해졌고 다른 레스토랑에 정식 요리사로 취직했다.

 요리사로 자리를 잡자 와인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일주일에 두 번 소믈리에 학교를 다니며 낮에 일하고 밤에는 책과 씨름했다. 최 팀장은 “몸은 고단했지만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일과 공부보다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소믈리에 자격증까지 따고 나니 고국이 그리워졌다. 2004년 한국에 돌아와 와인 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와인나라에서 직장인·학생들에게 와인과 테이블 매너, 파티 꾸미는 법 등을 가르친다.

 최 팀장은 요즘 새로운 꿈을 꾼다. 와인과 요리에 대한 지식을 결합해 이벤트를 꾸미거나 기업의 파티 문화를 바꾸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세컨드 라이프에 뛰어든 뒤 더 많은 기회가 열렸어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일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그래야 후회 없이 살 것 같아요.”

홍주연 기자

돌고 돌아온 길 '젖소는 나의 운명'

대기업 직원 → 낙농인 이경훈씨

 

충남 보령에서 젖소를 키우는 이경훈(37)씨는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난다. 젖을 짜 우유회사 차에 실어 보내면 오전 7시. 여물을 주고 아침을 먹은 후 축사를 청소한다. 오후가 되면 ‘후보 소’(젖이 나오기 전의 어린 소)들을 돌보고 5시에 오후 젖을 짠다. “젖소 일정에 맞춰 하루가 돌아가죠. 젖소 키우는 사람들은 ‘아버지 빈소를 지키다가도 젖 짜러 간다’는 말이 있어요.”

 8년간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고달프다는 이 일에 뛰어들었다. 일이 너무 좋아서라기보다는 “운명 같은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젖소를 키우는 아버지를 도우며 자랐지만 그 일을 이어받을 생각은 없었다. 대전에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임시직으로 입사했다. 충남 서산에 있는 간척본부 인력관리팀이었다. 한참 일에 재미를 붙여갈 무렵,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간척본부 인근에 정주영 회장의 소를 키우는 목장이 있는데 전기 목책기가 고장 나 소들이 뿔뿔이 흩어진 거예요. 간척본부 직원들까지 모두 나서 소를 찾는데 어릴 적부터 소를 다뤄본 제가 실력을 좀 발휘했죠.” 며칠 후 목장관리본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정직원 시켜 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회사생활은 즐거웠다. 96년 서산간척 관리과에서 일하던 동료직원 장경희씨와 사내연애로 결혼했다. 98년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을 때 소들을 이끌고 임진각까지 함께 갔다. 정 회장과 제일 먼저 북한으로 건너간 통일소 ‘은서’는 당시 2개월 된 그의 딸 이름을 붙여 이씨가 직접 키운 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생활에 재미가 없어졌다. “학벌 때문인지 승진이 안 되더라고요. 대기업 직원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평생을 걸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2003년 사표를 던졌다.

 30대 중반에 시작한 새로운 일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결국 젖소한테 돌아왔죠. 제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판단에서였어요.”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어린 젖소 15마리를 돌보고 있었다. 이씨는 정책자금과 시설자금을 대출받아 축사를 새로 짓고 폐업 농가의 쿼터를 사들였다. 젖 짜는 소 40마리와 후보 소 40마리가 그의 지금 가족이다. 하루 300kg이던 착유량은 995kg까지 늘었다.

 아직은 대출금 갚느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우유 소비는 줄고, 한-EU FTA가 체결되면 낙농업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흉흉한 이야기도 많이 들려온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소들이 여물 먹는 모습을 보면 뿌듯해요. 평생 갈 길을 찾았다는 생각이지요.”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 ‘험한 길’에 동참해 준 아내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자연 속에 사는 게 좋아서 남편이 회사를 그만둘 때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소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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