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빙벽」 허무십시오/남북정상에게 띄우는 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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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뢰없으면 회담 백번해도 허사
남북의 두 정상이 회담하기로 원칙적 합의가 있었고 이어서 그준비를 위한 실무진 회의가 열리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긴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국민의 대다수는 아직도 착잡한 심정을 금치 못합니다.과연 정상회담 이 이루어질 것인지,회담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공연한 시간 낭비에 그치지나 않을지 하는 염려가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낙관과 비관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가지 명백한 것은 우리 국민모두가 남북의 진정한 화해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이 민족적 염원이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두 정상에게 한두가지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두 정상은 역사의 큰 흐름과 우리 민족의 장래를 크게 내다보는 거시적 안목으로 문제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세계는 국제화 또는 세계화를 앞세우는 새로운 시대를 항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리 국제화 또는 세계화가 강조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강자의 논리라는 사실입니다.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비정한 역사속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 자신이 강자의 자리 를 차지하는 그것 뿐입니다.
우리 한반도가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힘을 합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본래 하나였던 우리나라를 남과 북으로 분단한 것은 강대국들의 자의였습니다.그러나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대국들의 기상도에 변화가 왔고,이제 우리만 잘하면남과 북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앞으로도 우리가 냉전의 벽을 허물지 못한다면,그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사가들은 앞으로 멀지않은 시기에 아시아 지역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날이 올때,우리나라가 중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세계사의 주역을 맡느냐 또는 그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그리고 남과 북의 두 정상은 우리 민족의 앞길을 결정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둘째로,남과 북의 정상은 성의와 신의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이른바「전술과 전략」의 차원에서 잔재주를 부리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2면에 계속>

<1면서 계속>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입니다.신뢰의 바탕이 없으면 백번의 정상회담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못할 것입니다.
비록 적국과의 교섭이라 하더라도 약속은 지키는 것이 정도입니다.이제 우리는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힘을 합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다시는 전술과 전략의 기교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이번 기회에 남북간 대화의 길을 크게 열어주기 바랍니다. 한반도의 문제는 남과 북이 직접 무릎을 맞대고 이성적 대화를 나눔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되풀이해 말하지만 남한과 북한은 본래 하나의 나라였습니다.따라서 남북사이의 갈등은 알고보면 집안싸움입니다.집안싸움에 제3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우리의 사태가 지극히 비정상적임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거시적 안목으로 세계사를 내다보는 관점에서 볼때,이 지구상에서 남한과 가장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나라」는 북한이고,북한과 가장 이해가 일치하는「나라」는 남한입니다.
제3국들은 각각 자기네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마련이고,경우에 따라서는 남북의 갈등이 지속되기를 내심으로 원할수도 있습니다.
국경선의 의미가 점점 축소되는 오늘날 우리가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고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 큰 잘못입니다.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체제가 다른 두 지역에 나뉘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빙벽을 쌓고 대화조차 거부한다는 것은 실로 해괴하고 부끄러운 현상입니다.<김태길 서울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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