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가위 우스갯소리에 담긴 해학 민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추석 명절에는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다. 이와 함께 말의 성찬(盛饌)도 나눈다.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두고 추석 민심이라고 부른다. 이 때 어떤 얘기가 주를 이루느냐가 향후 정치를 비롯한 여론 향배를 결정짓는다고 본다. 멀리는 1978년 부마항쟁이 추석 민심에서 비롯됐다. 당초 조세 저항의 성격을 띠었던 소규모 시위는 추석 연휴를 거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바뀌었다. 가깝게는 2002년 대선에서 서민풍의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완전히 제압하는 계기가 된 것도 추석이었다. 당시 이 후보의 자녀 병역 비리 의혹이 크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올해 추석 명절에 나누는 얘기로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통령 선거 전망은 오히려 뒷전이다. 추석 연휴 기간 중에도 검찰의 신정아 사건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는데다 신정아 사건이 워낙 관심을 끄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신씨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관계를 두고 언급한 ‘예술적 동지’라고 한 말이 유행할 조짐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는 남자 형제들끼리는 “요즘 남자들은 ‘예술적 동지’ 한 명 두지 않으면 팔불출”이라는 얘기를 하며 킬킬대기도 한다. 이를 듣던 아내들의 말, “예술적 동지를 한 명만 둔 여자가 진짜 팔불출이다. 예술 동지 정도가 배후면, 진짜 배후 세력은 수없이 많다.” ^^

30여년간 착실히 관료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변 전 실장의 처지에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말도 있다. 이 가운데 압권은 ‘운칠복삼’(運七福三)이라는 신조어. 기술보다는 행운이 중요하다는 의미의 ‘운칠기삼’을 패러디한 이 말은 인생사가 온통 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변 전 실장의 권력 남용이나 부적절한 관계 같은 일이 널려 있다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겠다.

변 전실장과 함께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처신을 둘러싼 논란도 화젯거리다. 이와 관련해 ‘청탁의 세 종류’라는 말도 세간의 화제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청탁이 있다. 첫 번째는 물 수 변의 맑을 청(淸) 자가 들어간 청탁이다. 이는 주로 인재를 천거하는 깨끗한 부탁으로, 오히려 권장돼야 한다. 두 번째는 말씀 언 변의 청(請) 자가 들어간 청탁이다. 이런 청탁은 늘 외압이냐 로비냐 논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약한 종류의 청탁이 있다. 바로 변이 없는 푸를 청(靑)의 청탁이다. 한 마디로 청와대의 부탁이다. 논란의 대상인 청와대 종사자들은 단순히 전화를 걸었거나 자리를 주선했을 따름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청와대에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전화나 자리 주선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신정아 사건과 정윤재 사건의 여파로 당초 추석 민심을 겨냥했던 범여권의 대선 후보 경선전은 큰 관심을 못 끌고 있다. 일부 후보의 경선 포기 여부가 그나마 관심사다. 이와 관련해, 인터넷에서는 경기고 출신의 후보가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농담도 널리 퍼지고 있다. 경기는 ‘경선 포기’의 약칭이라는 얘기다. 반면 1997년 경복고 출신의 이인제 후보는 ‘경선 불복’을 한 예가 있다.

5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이명박 후보에 대해서는 행운이 따르고 있다는 말이 많다. 한나라당 경선전 당시 도곡동 땅 관련 논란으로 박근혜 후보에 쫓겼을 때는 탈레반 납치 사건이 터져 국민과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최근에는 신정아 사건의 여파에 가려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흥행이 저조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도인 이 후보가 정작 이슬람과 불교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유머도 떠돈다.

추석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나누는 말, 그 가운데서도 우스갯소리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정곡을 찌르는 풍자와 해학의 정신이 담겨 있다. 동시에 민심과 여론을 좌우하는 영향력도 갖고 있다. 추석 명절이 끝나고 나면 추석 명절 전후의 말이 바꾼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여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