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때 가족 갈등 줄이려면 일단 말조심이 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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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5년인 한솔이는 궁금하다. 이번 추석에도 할아버지와 아빠가 다툴까.

“두 분은 늘 웃으면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선거니 지역감정이니 하는 문제를 두고 언성을 높여요. 할아버지는 늘 ‘자식농사를 잘 못 지었다’고 불쾌해하시고 아빠는 얼굴과 목이 빨개져요.”

직장인 권모(37)씨는 추석을 앞두고 집안일로 남동생과 다툴 생각을 하니 귀성길이 편하지 않다. 권씨는 “화를 내지 않고 얘기를 하려고 해도 말을 하다 보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감정이 섞이게 된다”며 “이번 명절은 감정을 추슬러야 할 텐데…” 하고 걱정했다.

주부 김모(33)씨는 아예 ‘명절’이라는 제도가 없었으면 좋겠단다.

“매년 시어머니와 잘 지내려고 고부갈등·가족갈등에 대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서 외우다시피 읽어요. 그런데도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끓어올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져요. 나중에 애먼 신랑에게 화풀이를 하죠.”

여름휴가가 끝난 지 한 달 만에 찾아온 ‘제2의 휴가’ 한가위를 맞아 의외로 가슴이 무거워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랜만에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면 갈등을 빚기가 일쑤여서 명절 자체가 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의아해한다. TV에서는 명절에 웃음꽃이 피는 가족의 모습만 비치고 남들은 고향길이 설렌다고 하는데 왜 우리 가족은 ‘오순도순’과는 거리가 멀까?

서울대 의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가족 간에 갈등이 없는 집은 드물며 갈등의 뿌리에 무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며 “정신분석학과 두뇌과학(Brain Science)을 알면 명절에 가족갈등을 줄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무의식 상처받으면 갈등 증폭

사람의 뇌에는 진화의 산물인 세 개의 뇌가 섞여 있는데 호흡과 온도조절 등을 맡는 ‘원뇌(原腦)’, 감정처리를 담당하는 ‘가장자리계’, 이성적 판단을 맡는 ‘대뇌피질’ 순으로 발전했다.

대뇌피질이 제대로 기능해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면 가족 간에 사소한 문제로 싸울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갈등은 가장자리계가 자극을 받아 무의식의 자기애가 상처를 입으면서 증폭된다. 가장자리계가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100여 년 전 보고됐다.

스위스의 정신분석가 에두아르 클라파레데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몇 분 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성 환자에게 손바닥에 핀을 감추고 악수를 해 고통을 줬다. 다음 날 이 환자는 클라파레데를 못 알아봤지만 악수를 청하자 기겁을 했다. 가장자리계는 이처럼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억, 자동차를 몰거나 피아노를 칠 때의 작업 기억 등을 담당하는 ‘생존의 뇌’다.

미국의 심리상담가 조레인 존스 박사는 “갈등 상황에서 자기보호 본능이 상처받으면 가장자리계가 활성화하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며 “이때 논쟁의 합리화를 가장자리계가 주도하므로 감정싸움으로 비화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가족 모이면 사소한 말도 상처

가장자리계의 영역인 무의식 속에는 의식의 영역에 남겨 놓으면 살아가는 데 힘든 요소들이 억압돼 있다. 이런 요소들은 주로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데 부모에 의해 자극받으면 억압받았던 요소들이 변형돼 의식의 세계로 올라오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반응하기 십상이다. 명절에 온 가족이 두루 모인 장소는 경험을 공유한 여러 사람의 무의식이 함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사소한 말에도 갈등이 생길 소지가 커진다.

양창순 신경정신과 원장은 “사회생활에서는 남의 무의식에 상처를 주면 반격을 받으므로 많은 사람이 조심하지만 가족은 무의식적으로 ‘내 편’이라고 믿고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다 표현해도 된다고 착각해 상대방의 무의식을 건드린다”고 설명했다. 특히 부모는 나이가 들면서 신체가 약해지고 호르몬 체계가 변해 상처받기 쉬워진다.
양 원장은 “부부의 정신세계 속에는 각자의 부모를 포함해 최소 6명의 정신이 꿈틀댈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가족 간에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민감한 주제 논쟁은 피해야

가족이 모이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가족도 남이라고 인정해 상처받을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가족의 말에 울컥 하면 ‘아, 내 무의식이 상처를 받았구나’라고 여기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만 해도 갈등이 증폭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서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화가 난다면 대부분 무의식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자신이 지금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에 대해 과거 어떤 경험을 했는지 돌이켜보는 것도 좋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심하다면 과거 친정어머니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 친정어머니가 강압적이거나 갈등의 뿌리였다면 시어머니와 생기는 현실적인 갈등이 무의식에 의해 그 이상으로 증폭된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만 해도 무의식이 편안해져 갈등의 소지가 줄어든다.

명절에는 스트레스 탓에 갈등이 증폭될 수도 있다. 피로하거나 환경이 바뀌면 가장자리계가 과잉활성화해 작은 일에도 흥분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피로를 느낀다면 가급적 민감한 주제에 대한 논란에는 끼지 않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좋다.
이성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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