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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鬪 팔도는 고도리공화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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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04면

조선시대 도박판을 그린 풍속화인 김양기의 39투전도39

화투짝이 잘 달라붙는 것으로야 오래도록 미제 군용담요가 최고였다. 가솔들은 저마다 제 분수를 알아 역할을 나누었다. 큰아버지는 물주가 되고, 조카는 대라가 되고, 시집 안 간 고모는 개평을 뜯다 이윽고 구실을 바꾸어 놀아나간다. 나중에는 치매예방에 좋다고 어른까지 끌어들이고 만다.
향리로 내려가는 밀리는 고속도로 승합차나 기차 안에서 벌써 판은 벌어진다. 평소에도 십리만 나가 놀 것 같으면 기계가 따라붙는다. 손이 심심하면 못 쓰는 양, 산과 들로 쏘다닐 적에도 계곡 밑에서도 끗발이 오르고, 내리는 판은 부처님전 절간 아래라고 마다하지 않는다. 개명한 해외여행길에도 화투 한 모쯤 챙겨가야 한다. 비행기에서 패를 돌리다 다투었다는 소식이 전해오는 지경이다. 주부도박단 검거 따위는 아예 입방앗거리가 되질 못할뿐더러 ‘하우스에서 꽃꽂이하는 일’로 교양있게 치장을 바꾼 지 오래다.

초상집에서는 으레 새벽녘이면 판이 커져 이윽고 문상 온 이유도, 상주마저 슬픔을 잊고 팔을 걷어붙이고는 비밀문서를 혼자 열듯 침을 바르면서 화투짝을 쪼인다. 애통함을 위로하고자 하는 게 문상이라면 화투판은 최고의 조문인 셈이다. 도박금령이 엄하던 시절에도 상갓집 판은 순검하지 못하는 게 고래로 팔도 윤리였다.
식당 서랍 안쪽에 기계 몇 모가 없다면 큰 단골은 없는 셈이라 쳐도 좋다. 골방에서 안방으로 거실로, 사무실, 하숙방, 목욕탕, 주차장까지 두 사람 이상이 모이는 곳에서는 패가 돌아간다. 인터넷 게임시장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도 단연 고도리다. 손전화에서도 마찬가지다. IT 한국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다 해도 어긋난 말이 아니다.

화투판이 천하 유흥 중 으뜸일세
한국인의 거의 모든 집단행동에 화투패는 동행한다. 한 가지 일만 처리해서 먹고살기 힘든 세상 이치가 화투판에 스며들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팔도는 고도리공화국이다. 지역과 영역과 세대를 넘어 고도리는 천하 유흥 중 으뜸이다.
한국인들이 화투에서 노름과 놀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절묘하다. 판검사는 부자들 판돈은 커도 놀이요, 가난뱅이 판돈은 작아도 노름이라 질러버리고 도박으로 간주하고 있는 걸 판결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리를 까질러진 패 보듯 단박 알 수 있다. 저잣 거리의 구분법은 이와 퍽 다르다. 애초에 판을 벌이기 위해 뜻을 모아 따로 모였다면 대개는 스스로가 노름으로 자인하지만, 놀다보니 48색 총천연색 컬러티브이 채널쯤 돌렸다면 오간 돈이 좀 되더라도 놀이로 여기는 태도가 상례다.
이런 지경이니 삼천만에서 사천만이 노름박사 ‘타짜’에 가까운 세상이다. 영화 ‘타짜’에 그토록 사람이 몰린 데도 다 까닭이 있는 터수다. 이들은 노름을 예술차원으로 끌어올리기라도 한 듯 분 발림하고 있고, 덩달아 관객들은 손맛이 다 싱싱해진 기분이었다.

한국 현대사는 도박의 세기
그네들이 과연 그저 노름 ‘타짜’에 반한 것일까.
어떻게든 타짜가 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게 한국의 20세기였다. ‘시험공화국’ 연필 굴리기에서부터, 대학입학 눈치작전, 취업원서 100군데 넣기는 실상 거의 도박에 가까운 것들이다.
돈벌어 식구들 먹여 살리기는 훨씬 더 타짜적 판단과 적응이 필요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강남아파트 당첨에서 보듯 삶이 벌써 도박이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표에 도달하기만 하면 운과 짜웅까지를 실력으로 쳐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민화투에서 팔색으로 다른 고도리까지 화투가 변화해온 내력은 거의 한국인의 시세적·사회적 내면을 압축하고 있다. 경쟁체제의 가속화와 물신주의를 화투규칙과 방식 변화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과 생활에서 타짜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거의 도태되거나 주류에는 언감생심 발을 붙이기는커녕 내밀지도 못했다. 피 끗처럼.

놀이와 놀음과 노름은 한 끗 차이다. 놀이는 말 그대로 노는 일이고, 놀음은 연희를, 노름은 도박을 이른다. 끗이란 말이 바로 노름에서 나왔다. 인심은 다르지 않아서 서양에서도 게임(game)이나 갬블(gamble)이 같은 뿌리에서 말미암고 있다. 벌어진 판이 노름이 되는 건 간명하다. 돈이나 물건이나 사람을 걸고 내기를 하면 도박이 되는 것이다. 노름이 발화작용이 더 큰 까닭은 놀이와 놀음을 아우르고 있는 데다 불확실한 결과나 우연이 가져다주는 위험과 도전과 모험이 더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불확실성이 불확실한 사회에 사는 한국인들을 불안하게 매료시켰다. 격동하는 현실은 생존을 위해 실력 말고도 놀라운 예지력, 곧 감을 요구했고, 이를 일상에서 예행연습하도록 화투판 속으로 밀어넣었다. 이를 통해 상대의 실력을 간파하고, 감과 겨루고, 막판이라도 요행과 운수로 뒤집을 기회를 노리고, 과단성 있는 판세 주도로 마침내 이를 종합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훈련을 해온 격이다. 오호, 통재라.

시대를 풍자해온 ‘두뇌 스포츠’

‘삼단삼약’ ‘삼단삼시마’ 따위로 부르던 민화투는 1960년대 중반 급격하게 변화한다. ‘민’이란 다른 화투방식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밋밋해서 붙은 이름으로 보고 있다. 60년대 한국사회는 5·16쿠데타 세력이 장악한 정권이 일정하게 안정성을 획득하면서 사회경제적 변화가 크게 일어난다.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과 다시 교류를 하게 된 것도 화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민화투는 노름세계에서 밀려나고 육백과 나이롱뽕이 주류를 형성한다.
화투 한 모는 12개월 또는 12가문이 저마다 광, 열, 띠, 피로 구성되어 있다. 민화투가 가문끼리 그림과 짝을 맞추는 직렬적·평면적 방식인 데 반해, 육백과 나이롱뽕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이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는 입체성을 띠고 있다. 나이롱뽕은 조금 앞선 시기에 나온 화학섬유 이름이 정치판을 비롯한 시세에 이미 풍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가 화투에 반영된 경우다. 우리말에서 뽕이란 세속화된 여러 뜻을 담고 있다.
육백이 600점이 나면 한 판이 된다는 점에서 투기성에 상징적 제한과 절제를 두고 있다면, 나이롱뽕은 참여자를 네댓 사람으로 확장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둘이 만나면 육백을 치다 나이롱뽕으로 판을 바꾸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그 무렵 남도에서는 재끼(잡기)로 삼봉을 치고 있었다. 아직까지 화투에서 지역색이 남아있어서 딴에 제법 민속적이기도 하다.

고도리는 70년대부터 유행했다. 이는 일본의 고이고이(오라오라)에 하치하치(팔팔)를 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는 일본말로 ‘5’, ‘도리’는 ‘새’란 뜻이다. 코흘리개들이 구슬치기나 짤짤이에서 ‘이찌 니 쌈’이라 하는 것이나 ‘가위바위보’를 ‘장깸뽀’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 고도리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0년대에 일본에서 건너와 70년대에 자리를 잡고, 80년대에 ‘전두환 고도리’를 기점으로 국민 두뇌체조 또는 두뇌스포츠로 널리 확장되어 생활로 굳어졌다.
육백에서 ‘오광’과 ‘칠띠’로 판을 끝내는 규칙을, ‘스톱’과 ‘바가지’는 나이롱뽕에서 검증된 권력행사 방식을 가져와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게 고도리다. 고스톱이란, 뜻은 무관하지만 기본적으로 고도리의 ‘고’가 판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스톱’은 판을 끝낸다는 것을 영어 단어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한국 사회에서 영어의 지배력을 자연스럽게 표출·상징하고 있다.

쇼당, 나가레(리), 기리 등 화투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거의 일본말인 데다 노름방식 이름은 영어라는 점에서 한국 노름사회의 정체성을 질문해볼 만하다. 가장 창조적인 영어는 따블을 넘어선 따따블이다.
쓰리고에 피박이나 판쓸이, 설사 등과 전두환 고스톱은 잘 어울린다. ‘전고’는 상대 패에서 아무 거나 한 장씩 빼앗아 판을 쓸어버릴 수 있는 엽기적인 방식이다. 정치상황이나 정치인 이름을 빗댄 풍자고스톱 전성기가 80년대다. 최규하 고도리,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 고도리, 하물며 이순자 고도리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피가 중요해졌다. 이름 없고 힘없는 대중도 모이기만 하면 판을 뒤엎거나 어찌해볼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 담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광박과 폭탄이 새로운 규칙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고스톱 방식은 앞으로도 끝없는 변천을 거듭할 게 틀림없다.
한국 자본주의 속성이 험할수록 가혹한 우연과 징계와 갈취적 규칙이 노골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대선 정국의 변화에 따라 정치풍자 또한 빠뜨리지 않을 터이다.
바라건대 화투 규칙이 순치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 것인가.

하나후타, 화투, 그리고 이완용
48장 ‘동양화의 내력'

화투는 16세기 일본 규슈 다네마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건넨 카르타(carta)에 기원을 두고 있다. 카르타는 왜색화하면서 하나후타(花札) 또는 하나 카르타가 되었다. 17세기 중엽 조선통신사가 전한 수투(數鬪)도 일정하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화투 그림은 붓으로 그린 게 아니라 에도(江戶)시대에 널리 유행한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로 찍어낸 것이다.
화투의 12달은 일본의 4계를 초목 문양을 중심으로 반영하고 있다. 1월 송학과 2월 매조는 따뜻한 일본 날씨에 피는 매화와 텃새 꾀꼬리를, 3월 사쿠라(벚꽃)는 더 설명할 것도 없다. 4월은 흑싸리라고 부르나 정작 등나무이고, 5월 난초는 붓꽃, 6월 모란에는 나비가 날고 있다. 한국에서는 선덕여왕 고사에서 알고 있듯 향기 없는 꽃 모란에 나비를 그리지 않는다. 7월 홍싸리에 멧돼지는 일본에서 사냥철을 뜻하고, 8월 공산명월은 일본 명절 월견자(月見子)를, 9월 국화는 서리에도 지지 않는 기상이 아니라 무병장수를 기려 국화술을 담가 먹는 풍습을 담고 있다. 10월 단풍은 ‘낮 홍엽, 밤 홍등’ 풍습에 사슴 사냥철을 알리고, 11월 오동은 본디 일본에서 12월로 덴노의 도포 문양이고, 12월 비에 나오는 갓 쓴 이는 10세기 일본 서예가 오노도후와 설화(개구리가 버드나무에 뛰어오르는 걸 보고 힘써 사는 이치를 깨달았다는)를 담고 있다.
이에 맞서 겨레의 정기를 새롭게 하겠다는 의지로 ‘한투’가 나오기도 했으나 역부족인 듯하다.

하나후타가 조선에 건너온 건 대개 갑오년(1894)으로 보고 있다. 동학농민투쟁과 그 좌절에 이어 일제가 실질적 한반도를 장악해 가던 때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왜인들이 서울과 항구들에 화투국을 설치하면서 신사와 상인들이 파산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인들이 기교로 이목을 현란하게 부려 도성에는 절도가 많다고 했다. 전문 타짜(打者)들이 건너왔음 직하다. 일찍부터 일본에는 이러한 전통이 강했다. 야쿠자란 본시 에도 정부 아래서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막부나 번의 공사판에서 일꾼들이 받아간 품삯을 노름으로 되찾아와 바치는 구실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자기 구역에서 ‘삥뜯기’를 용인받았다.
이 하나후타는 매국노 이완용에게는 제법 약이 되었던 모양이다. 근육이 당기고 쑤시는 견인증을 앓았던 이완용은 통증을 잊고자 화투를 가까이했다. 그가 화투명인 첫 번째 이름으로 등극하고 있는 게 그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을사오적’들은 두루 화투를 즐겼다. 나라를 팔아먹던 일에 비기면 뻐근한 긴장감은 자못 미치지 못했을 터이다. 그에 버금가는 망실 황족 이지용이 화투 중독으로 신세를 조지는 것도 화투 내력에 심각한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실로 우리네 화투 이력은 을씨년스럽다 하겠다. ‘을씨년스럽다’는 말 자체가 ‘을사년스럽다’에서 비롯되었으니 딱하지 않을 리 없다.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에 도박을 엄히 단속했다. 식민지배의 윤리성을 외형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자 조선 민중의 일상과 욕망을 통제하는 주요한 무기였던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수탈체제 내에서 자칫 방임할 수 있는 노동통제를 틀어쥐는 일이기도 했다. 이들은 화투는 못하게 하면서 화투를 만들어 파는 일에는 세금을 물렸다. 세계공황이 찾아오자 골패세령(1931)을 발동하고, 마작판(1932년, 종로 내 60여 개 마작구락부) 등에서 나오는 도박 수익으로 부족한 식민지 재정을 메워나갔다.
참고로 한국 복권의 근대적 ‘효시’라고 할 ‘승찰(勝札)’ 또한 45년 4월 일제가 조선사람 주머니를 털어내 전쟁자금을 마련코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서구식 경마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마사회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마사회를 이은 것이다. 54년에 뚝섬경마장이 들어서기 전 서울경마장에서 이미 ‘맛뚜기’를 비롯한 도박이 버젓이 성행했다. 빠찡꼬는 5·16 직후 김종필 주도로 500여 대(혹은 2000여 대)를 들여와 증권·워커힐·새나라자동차와 함께 공화당의 창당자금화했다는 의혹을 받은 뒤 몇 가지 경로를 거쳐 민간업자에게 이전되었다. 한국 도박계는 일본으로부터 좀처럼 자유워지기 어려운 내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화투로 굳건히 자리잡은 하나후타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다시 한반도 노름판을 장악하게 된 데는 그만한 연고가 있다고 해야겠다.

세계 도박과 복권의 역사
선지자 모세도 ‘로또’를 하다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여러 종류의 주사위가 나왔고 다른 문명발상지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도박은 줄기차게 역사와 함께해왔다. 이집트에는 달력 신이자 도박 신 타후티(Djehuty/Thoth)가 있고, 사하라에도 도박이 있어 사막을 횡단해 여러 부족에게 전파되었다. ‘리그 베다’에 ‘주사위 열매는 나를 거의 미치게 한다’는 노래로 남아 고대 인도에서 주사위를 던지던 노름꾼의 절박함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열매란 주사위로 삼았던 나무 열매나 양 복사뼈 따위를 이른다. 상아·나무·쇠·플라스틱이 그 뒤를 잇는다.
고대 중국 상나라에도 벌써 도박이 있었다. 주나라에는 저자에 도박하는 집이 따로 있었다. 서양보다 500년 이상 앞선 로또의 동양적 원형이라 할 만한 36마리 동물 카드를 이용한 숫자 도박이 일찍부터 중국 대륙에 있었다. 흉노와 연관이 있는 훈족에게는 ‘아내를 도박에 거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게르만족은 돈이 다 떨어진 막판에는 몸을 걸고 도박을 하다 지면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하기야 제우스, 하디스, 포세이돈 세 신이 세상을 천국, 지옥, 바다로 나눌 때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천지창조가 도박이라니. ‘민수기’ 26장 51~56절에 보면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물론하고 그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Each inheritance must be assigned by lot among the largest and smaller trial groups)’는 구절이 나온다. 모세가 ‘by lot’라 한 것은 도박이라기보다 땅을 나누는 데 신의 뜻에 따랐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시대도 도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명한 군주였던 세종 임금은 동전을 생산하면서 노름에 이용되지 않을까 지레 걱정을 했는데 역시 안목이 높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박당 무리가 출현해 도적질까지 하고 있는 건 중종 연간이다. 송파장에서 벌인 산대놀음에 투전으로 운명을 점치는 대목은 당대 도박사회학을 형상언어로 전승하고 있다. 이는 ‘상평통보’의 대중적 유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천주학쟁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이 남긴 ‘한경사’ 106수는 당시 노름판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묘사가 압권이다. 연암 박지원은 문장이 막히면 홀로 쌍륙을 쳤다고 전한다. 왼손 오른손을 다른 편으로 삼아 혼자서 대국을 즐겼다니 도박 중증이라고 봐야 한다.
‘경자년 봄에 촉석루에서 떠들썩하게 악기를 연주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파하였습니다. 심 비장과 함께 저포 노름을 하여 삼천 전을 가지고 여러 기생들에게 뿌려주며 즐겁게 놀았던 일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이윽고 그는 『목민심서』에서 도박의 폐해를 통렬하게 꾸짖는다. 화폐 유동성이 없던 때이고 보면 노름이 실물금융경제에서 한 구실을 한 대목이 있을 법하다.

유럽으로 건너가 보면 노름이 국가 사업의 근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권의 국가 전매는 1759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동시에 다른 복권들은 불법이 되었고 복권기금은 국가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영국 웨스트민스터 다리(1739), 대영박물관(1753)을 세우는 재정의 상당부분이 복권에서 나왔다.
미국도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복권을 적극 활용했다. 독립영웅 벤저민 프랭클린은 독립전쟁에 필요한 대포를 복권으로 찍어냈다. 조지 워싱턴은 로키산맥 너머로 ‘서부개척시대’를 여는 데 복권에서 돈과 힘을 얻어 썼다. ‘프런티어’의 심장은 복권에서 먼저 뛰고 있었던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이 발행한 개인 복권으로 개인 빚 8만 달러를 갚고 있다. 복권을 사는 사람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 또한 엇비슷하다. 그들에게서 얻은 돈으로 그들을 가두고 있는 꼴이다.
최초로 대중도박장이 베네치아에 합법적으로 개장한 것은 1826년이었다. 상류층들은 여기서 노름과 더불어 다른 욕망도 아울러 해결했다. 노름, 성매매, 술은 일찍부터 삼형제였다.
종이값, 인쇄비, 관리비 말고는 달리 들어갈 게 없는 게 복권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복권 로또 따위를 ‘굴뚝 없는 산업’을 넘어 ‘저항 없는 세금’ ‘고통 없는 세금’ ‘마비된 세금’ ‘표시 없는 착취’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북한도 90년대 초 ‘추첨제저금’, 곧 변형된 복권을 발행하고 있다.


서해성씨는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연구자이자 소설가로 ‘아! 고구려전’ 과 같은 전시기획팀, 시민방송 창설팀 등으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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