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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선의 끝은 어디에…(「파라슈트 키드」의 낮과 밤: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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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외톨이 면하고 보호막” 갱단 기웃/조기유학생 일수록 빠지기 쉬워/돈자랑말고 마약은 쥐약으로 여겨야 안전
『처음엔 할리우드에 있는 어머니의 외사촌집에 있었어요. 집에서 제 뒷바라지하라고 꽤 많은 돈을 보내주긴 했지만 처음 본 친척에게 잔소리 듣기도 싫고,나를 귀찮아한다는 느낌이 갈수록 커졌지요.』
몇차례 다툰뒤 서울의 부모를 졸라 반년만에 월세 7백달러짜리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기 시작했다는 B군(20).
마약 탓인듯 얘기도중 종종 엉뚱한 답변을 하거나 뭔가를 중얼거린다.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얼굴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5월17일 낮 미국 LA 사우스 페덜리가 LA카운티 보호관찰국.
범죄를 저지른뒤 보호관찰을 조건으로 풀려난 10∼20대 초반 청소년들이 형식적이지만 담당 보호관찰관에게 「얼마나 개과천선했는지」를 정기면담을 통해 점검받으러 드나드는 곳이다.
『지난번 만난이후 어떻게 지냈나.』
『어머니가 서울에서 오셨어요. 학교에서는 퇴학처분을 받았구요.』
사방이 흰 벽으로 된 20여평 크기의 1층 대기실에서 넷댓명의 흑인 청소년들 틈에 끼여 면담을 기다리다 보호관찰관 앞에 앉은 B군은 머나먼 객지에 홀로 떨어진 전형적인 「파라슈트 키드」.
서울 강남의 고교 1학년(90년)이었던 B군의 성적은 40등을 오르내려 서울시내 대학은 고사하고 그대로 가다가는 지방대학 진학도 어려운 처지였다. 중소기업 사장인 아버지는 조기유학을 결심했고 6개월간 어학원을 거쳐 한학년을 낮춰 LA북부 밸리지역 고교에 진학했다.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학교에선 여전히 영어가 달렸어요. 영어를 못한다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바나나」(외모는 동양인이지만 사고방식과 행동은 미국인 같은 동양인을 멸시하는 속어)가 미국 친구들 보다 얄밉더군요. 참다못해 학교가 끝난뒤 두들겨 팼지요. 그 다음부터 공부를 잘하거나 덩치가 크거나 잘난체하는 친구들은 모조리 내 주먹맛을 봤을 겁니다.』
1m83㎝의 훤칠한 허우대로 허구한 날 얄미운 친구를 골라 폭행하고 편싸움을 벌이는 사이 B군은 학교의 문제아들 사이에 영웅(?)이 됐다.
B군은 이들로부터 자연스레 대마초를 배웠다.
같은 학교에서 유학은 비슷한 처지의 한국인 여학생과 한번 불장난을 한뒤 아예 동거하기도 했다.
싸움판에서 알게되고 불량친구들의 소개로 사귀게된 갱단이 자연스레 B군 주위에 모여 들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10분거리의 B군 아파트는 점차 아시아계 불량친구들의 아지트 비슷한 곳이 돼버렸다.
『우선 어려운 영어가 필요없었어요. 서로의 눈빛만 봐도 통했고 같이 몰려다니는 순간은 모든 것이 우리의 세상이었죠.』
B군은 2년전 정식으로 갱단 가입 제의를 받고 신고식을 치렀다.
『오른쪽 팔뚝을 베트남 친구가 담뱃불로 지지기 시작했어요. 이를 악물고 불이 꺼질 때까지 참았죠. 세차례 의식이 끝나자 보스격인 캄보디아 친구가 「OK」라며 악수와 포옹을 해왔고,동료들도 환호를 지르며 환영했어요.』
「얼마나 강한가」를 시험하는 「형제의 의식」을 거쳐 이 지역을 본거지로 한 청소년 범죄조직 ABB(Asian Bad Boys)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시아계와 어울려
현재 LA의 크고 작은 청소년 갱단은 줄잡아 5백개 안팎.
이중 아시아계 조직이 1백50개,한국인 갱단은 20개 정도다.
연령층은 대체로 10대 중반∼20대 초반,조직원수는 적게 10여명에서 최고 1백여명에 이른다.
주요 한국인 갱단은 LGKK(Last Generation Korean Killers),FTM(Flip Town Mobster),TNT,KTM(Korea Town Mob),CYS(Crazy Boys) 등.
처음엔 교민자녀가 주축이었지만 최근엔 돈많고 차를 가진 조기유학생들도 꽤 가담해 있다고 LA한인타운을 관할하는 윌셔경찰서에서 만난 한상진수사관(41·교포)은 말했다.
B군은 칼이나 권총을 품은 패거리와 몰려다니며 차량강탈(car­jacking)이나 업소 갈취 등 비행에 빠져들었다.
처음 대마초에서 회로뽕으로,나중엔 효과가 가장 강하다는 대마초에 코카인가루를 섞은 속칭 「프리모」를 태우며 환각에 빠지는 사이 공부는 아예 남의 일이 돼버렸다.
집에서 보내주는 한달 2천달러(약 1백48만원)의 용돈은 고교생으론 거금이었고 거기에 차까지 가진 그는 캄보디아·베트남인들이 주축인 조직내에서 「필수요원」으로 커갔다.
B군의 탈선은 물론 극히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의지력이 형성되지 못했고 사춘기의 호기심이 큰 조기유학생들이라면 자칫 누구라도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이다.
4만3천명(외무부 추산)에 이르는 미국 유학생중 약 1만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조기유학생,특히 LA에 1천∼1천5백명이 밀집된 이들 어린 유학생들은 성인 유학생들보다 훨씬 더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조기유학생들은 갑자기 달라진 언어 장벽과 외모,주위환경에서 가족의 해체라는 심리적 상태에서 외톨박이라는 소외감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 공허감을 갱단이 채워주지요. 갱단 가입의 혹독한 의식은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보스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외부의 물리적·정신적 공격으로부터 구성원은 보호받는다는 귀속감을 갖게 됩니다.』
16년째 아시아 갱단만을 다루어온 보호관찰관 오성환씨(51·교포)의 분석이다. 이들의 탈선은 쉽게 마약과도 연결된다.
LA시내의 8가와 패드로가 사이,9가와 아드모어사이,산마리노 등의 거리에는 매일 저녁 무렵부터 마약거래가 공공연히 이뤄진다.
주로 히스팩닉(중남미)계에 의해 대마초나 코카인·히로뽕이 5∼10달러면 몇회분을 간단히 구할 수 있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밤 9시쯤. 취재진은 한인상가 중심가인 올림픽가와 버몬트 교차지점에서 걸어서 5분거리인 이면도로 패드로가에 차를 세웠다. 으슥한 구석에서 서성거리던 3명의 10대 히스패닉중 한명이 좌우를 살피며 다가왔다.
『What's up. Want it?』(무슨 일이야. 필요해?)
10달러를 쥐어주며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고 『고객중 한국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한인타운이 가까이 있어 고객중 90%가 한국인』이라고 했다.
○공공연한 마약거래
어린 유학생들도 있느냐고 묻자 『상당수』라고 했고,어떻게 유학생인줄 아느냐는 질문엔 『They speak like you』(너처럼 영어가 서투르다는 뜻)라며 돌아섰다.
취재를 안내한 교포대학생이 『오래 머무르다가는 총알세례를 받는다』고 서둘러 직접 거래현장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탈선 유학생들 사이에 마약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어린 나이의 유학생들은 문화의 차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곤 그 도전에 순응할 것인가,공격할 것인가를 놓고 심적 갈등을 겪게 되지요.』
한국사회병리연구소 백상창소장(정신과의)은 달라진 환경에서 청소년들이 정상적인 적응을 못할 경우 순응형은 술·도박 등의 유흥으로,공격형은 자칫 갱단 가입이나 마약·동거·자살·살인 등 부모가 상상조차 못하는 비극으로 향하게 된다고 진단한다.<김석현기자><관련취재일기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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