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경기 회복, 두 나라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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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4년 1월 14일 오전 10시 서울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은 '일자리 만들기'를 화두로 연두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盧대통령은 "올해는 일자리 만들기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겠다"며 정부의 모든 역량을 경제 회복에 집중할 것임을 천명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바다 건너 일본 도쿄(東京)의 일본 총리관저에선 색다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가 주최한 '일본경제의 르네상스-경제회생과 새로운 도전'이란 주제의 경제정책 포럼이다.

이 자리에는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정책.금융담당 장관과 한국의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미국의 로렌스 린지 전 백악관 경제보좌관 등 한.미.일의 경제전문가와 일본의 기업인.의원 20여명이 참석해 일본의 경제개혁 방향과 전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날 정책포럼의 주제와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일본이 뭔가 달라졌음이 감지된다. 우선 이날 포럼의 주제로 잡은 '일본경제의 르네상스'란 말부터 심상치 않다. 르네상스는 '재생 또는 부활'이란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실제 쓰임새로는 활활 살아나고 번성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포럼의 부제로 제시된 '경제회생과 새로운 도전'은 그 르네상스의 실체가 뭔지를 보여준다.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있으니 이제는 미래에 대비할 때라는 얘기다.

기조 강연에 나선 다케나카 장관은 "일본 경제가 올해 1.8%의 실질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며 경제회복에 대한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같은 경제회복세를 바탕으로 2010년에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흑자로 돌려놓겠다는 야심찬 목표도 내놨다.

여기서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동안의 무기력한 일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침체 속에 보낸 일본이 드디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경제전문가들이 가망없다고 치부하던 일본 경제가 아무런 노력없이 그저 부활한 것은 아니다. 암울하던 불황의 시기에도 일본은 구조조정과 연구.개발(R&D) 투자를 꾸준히 계속했다. 일본의 제조업은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경제회복 이후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구조조정 전문가와 미국의 경제전략가까지 부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까스로 지펴 놓은 경제회복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외국의 경험과 지혜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9일 의회 개원연설에서 드디어 공식적으로 "경기가 회복됐다"고 선언했다.

그 사이 한국은 여전히 경제회복의 실마리를 잡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다. 내수(內需)는 여전히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정부는 외수(外需.수출)마저 줄어들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여기다 盧대통령의 '경제 살리기'다짐은 일찌감치 불붙은 총선의 열기에 휩쓸려 벌써 빛이 바래고 있다. 경제 살리기의 선봉에 서야 할 장.차관들은 줄줄이 총선주자로 불려나가고, 경제회생을 위해 정부가 내놓는 각종 정책은 '총선용 선심공세'로 매도당하고 있다.

'경제회복에 매진하겠다'는 약속은 '총선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현실 앞에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는 형국이다. "흡사 총선 후에는 미래가 없는 나라 같다"는 한 기업인의 말이 귀에 꽂힌다. 이 판에 일본의 경기회복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내년 이맘때에는 '경제가 완전히 회복됐다'는 대통령의 공식 선언을 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