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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서 독립한 우즈베크공(설땅없는 중앙아 한인들 현지르포: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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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앙아시아의 한인(고려인)들에게는 2개의 고향이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되기 전 정착했던 연해주,그리고 고국이다. 35만여명의 한인들은 구 소련 해체이후 소수 민족국가들이 잇따라 분리독립하는 소용돌이 가운데서 생활터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살길을 찾아 연해주로 돌아가자는 귀향의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우즈베크 방문을 맞아 특파원을 현지에 파견,동포들의 현실과 연해주 이주 전말을 시리즈로 살펴본다.<편집자주>
◎소수민족에 드센 텃세/역도코치 졸지에 보신탕 장수 신세/평생 써온 러어도 금지 이주생각만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지만 널찍널찍하게 잘 정리된 도로,우거진 가로수,한적한 거리를 보면 우즈베크의 수도 타슈켄트가 그럴 수 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우즈베크 독립의 충격파는 20만 한인사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어디서나 느낄 수 있다.
타슈켄트 동부 한인 집단거주지역 가운데 박치미르의 보신탕집 주인 김다닐씨(43).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의 처지를 납득할 수 없는 당혹감 속에서 벌써 1년 넘게 살아왔다. 92년 8월 우즈베크 독립전까지만 해도 구 소련에서 유능한 역도 코치라는 자부심으로 어깨를 으쓱했던 김씨는 어느날 갑자기 한인들을 상대로 보신탕이나 양고기 구이를 팔며 사는 뜻밖의 처지로 바뀌었다.
그가 지도한 선수가 92년 4월 덴마크 역도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고 그해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땄을때 그는 우즈베크 자치공화국 뿐 아니라 구 소련 체육계에서 나름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됐다. 그러던 그가 92년 9월 우즈베크 독립이후 우즈베크 국적의 러시아계 선수를 데리고 92년 11월 런던 역도대회에 출전하려고 하면서부터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우즈베크정부는 러시아인 선수대신 우즈베크인 선수를 출전시키라고 종용한 것이다.
우즈베크인 선수는 기량이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항의했고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동안 우즈베크 정부가 공식 회의석상에서나 공식문서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말고 우즈베크어를 사용하라고 지시했지만 「이제 무슨 우즈베크 말을 배우겠느냐」 싶어 무시했었는데,그게 우즈베크사람이 자기민족 위주로 모든 것을 해나가겠다는 뜻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결국 그는 우즈베크정부에 『이런 식으로 체육정책을 해나가면 안된다. 미국은 실력만 있으면 피부색과 관계없이 출전시키지 않느냐』며 대판 항의한뒤 코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1년 넘게 뚜렷한 직업없이 소일하다 최근 도로변에 「한국집」이라는 식당을 차려 놓고 개고기나 양고기구이·국수를 파는 식당을 하게 됐다.
○콜호즈간부 빼앗겨
우즈베크가 92년 9월 구 소련에서 독립한 뒤 처지가 바뀐 한인은 김씨만이 아니다.
타슈켄트 동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콜호즈 레닌스키 푸치(레닌의 길)에 사는 허게나지씨(46)의 신세도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다. 목화를 주로 생산하는 이 콜호즈에서 10년 넘게 중간 간부인 작업반장을 했던 허씨는 지금 전혀 엉뚱하게 개인업체에 고용돼 비즈니스를 하면서 지난해 잠깐 살다온 원동(연해주)으로 다시 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허씨가 원동에 나가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가 한창이던 90년도쯤 부터였지만 실천을 결심하게 된 것은 우즈베크 독립이 계기였다.
우즈베크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콜호즈 중간간부 자리가 슬금슬금 우즈베크인으로 교체되더니 급기야는 농장의 공식행사나 공식문서에 러시아어를 일절 사용하지 말고 우즈베크 언어만을 사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허씨는 이 나이에 어떻게 새로 말을 배우겠으며 결국 이렇게 나가다가는 언제 일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즈베크 말을 모르는 큰 아들 로베르트(26),작은 아들 알베르트(21)의 장래도 걱정됐다. 그는 그래서 그동안 마음속으로 키워왔던 원동으로의 이주를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두 아들은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이곳에 친구가 있고 터전이 있는데 왜 도망가듯 이사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우즈베크가 더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반대하는 두 아들을 남겨놓고 일단 허씨 내외만 시험삼아 가보기로 했다. 마침 아는 사람이 원동 우수리에서 건설공사를 하는데 집을 제공하고 공사간부로 쓰겠다고 해서 쉽게 결심할 수 있었다.
○자식과 생이별할판
93년 1월 갖고 있던 승용차 지굴리를 37만루블(당시 환율로 약 48만원)에 팔아 경비를 마련했다. 그 액수는 당시 러시아인 평균 월급의 2년반치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93년 3월 우즈베크를 출발해 그해 5월까지 우수리에서 살았는데 정착하려 했지만 둘째 아들이 오지 않겠다고 해 할 수 없이 농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여기에서 15년을 살아온 우리가 그래 떠나고 싶겠습니까. 그렇지만 백계말(우즈베크어를 한인들이 낮춰 부르는 말)을 모르니 살 수 있겠습니까. 소비예트 시절이라면 승진이라도 기대하면서 살겠지만 지금은 무슨 희망으로 살겠습니까.』
콜호즈부속 백화점 점원인 허씨의 부인 이마씨(45)가 손님이 하나도 없는 가게를 지키며 힘없는 표정으로 내뱉듯 말했다. 우즈베크에서 김다닐씨와 허게나지씨의 경우는 유별난 것이 아니다. 한인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사연중 하나일 뿐이다. 소수민족 가운데 앞선 민족으로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누려왔던 한인들의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타슈켄트=안성규특파원>
◎우즈베크공/한인 20만여 거주… 다수종교는 회교
구소 연방국인 우즈베크는 지난 91년 8월31일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탄생했다.
인구는 2천1백만명으로 우즈베크인이 71%를 차지하고 있으며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한인들중 절반가량이 이곳에 정착. 현재는 20만여명이 살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2배에 달하는 44만7천평방㎞. 다수종교는 회교(수니파).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이끄는 우즈베크정부는 소련 붕괴의 충격 여파를 최소화하고 다민족국가의 혼란과 분열을 막기위해 안정제일주의의 보수노선을 취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면화생산국중 하나지만 기계설비 등의 미비로 원료공급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금생산량은 세계 8위. 국민총생산(GNP)은 2백82억달러(91년)이며 1인당 GNP는 1천3백달러.
92년 1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같은해 6월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역사적으로 본 구소이주 한인/1863년 연해주 첫 정착… 스탈린이 37년 중앙아로 강제이송
구 소련에 살고 있는 45만여명의 한인들은 암울했던 우리의 근세사와 그 운명을 같이했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지금부터 1백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따르면 1863년 가난과 지방관리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한인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건너가 정착한 것이 최초로 되어 있다. 이후 매년 이주가 늘어 5년후 1868년에는 연해주에 사는 한인들이 모두 1천8백여명에 달하게 된다.
특히 한반도에 흉년이 드는 해에는 굶주림을 피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1869년에는 6천5백여명이,1879년엔 8천4백여명이 건너간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1884년 한로 수호통상조약으로 한인의 연해주이민은 법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고 한로전쟁(1904년)으로 러시아가 패전하는 시기까지 한인들의 이주는 절정을 이룬다.
일본에 패한 러시아는 1909년 반한인법을 제정,한인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기업체에서 한인들을 해고하는 등 탄압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0년대초까지 연해주 한인들은 러시아의 탄압과 일제에 맞선 독립투쟁의 어려운 시기를 맞아야 했다.
이후 비교적 평온기를 보내던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낯선 중앙아시아에 강제로 보내진다.
강제이송과정은 매우 참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군인의 총칼앞에 강제로 열차에 태워진 한인은 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18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송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가축처럼 열차에 빽빽이 실린 채 한달을 달려 내린 곳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우즈베크의 허허벌판. 땅굴을 파고 갈대로 움막을 짓고,버려진 집단농장촌에서 혹한의 첫 겨울을 보냈다. 독거미와 독사,학질·이질과 싸우면서 또다시 셀 수 없는 목숨이 사라져야 했다. 한많은 제2의 러시아 이주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탄압받고 실추된 한인들의 명예는 지난해 4월9일 「재러시아 한인 명예회복에 관한 법」이 발효됨으로써 56년만에 회복됐다. 그러나 이제 구 소련 해체이후 부상한 소수민족들의 텃세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이원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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