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수업료' 치르는 첫 주민소환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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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해 도입된 주민소환제의 첫 실험장으로 관심을 모았던 김황식 경기도 하남시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 절차가 중단됐다.

수원지법 행정1부의 재판장인 여훈구 부장판사는 13일 김 시장과 하남시 의원 등 4명이 하남시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낸 '주민소환투표 청구 수리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에 따라 20일로 예정된 주민투표는 일단 연기됐으며 김 시장은 항소심(서울고등법원) 판결 시까지 시장직 권한이 회복됐다.

이번 일로 주민소환제는 첫 실험부터 '비싼 수업료'를 물게 됐다. 당장 5일까지 접수된 부재자 투표 신청서가 모두 무효가 되는 등 그동안 투표 운동과 투표 준비를 위해 썼던 수억원의 주민세금은 모두 허공에 날아갔다. 하남시 주민과 우리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도 크다. 김 시장 측과 반대 측의 갈등과 상처가 봉합되지 않은 채 더욱 깊어지고 있고, 주민소환제의 부작용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주민 서명부에 법적 하자"=재판부는 주민소환 투표를 실시해 달라고 선관위에 제출된 주민 서명부에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서명부에 먼저 청구사유를 적은 뒤 주민서명을 받도록 돼 있는데 이런 법적 절차를 어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효 처리된 서명을 제외하면 유효한 서명의 총수가 법정 요건을 충족한다고 볼 수 없어 선관위의 주민소환투표 청구 수리처분은 위법하다고 재판부는 판결했다.

김 시장과 반대 측 주민들은 지난해 10월부터 광역 화장장 유치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김 시장은 "광역 화장장을 유치하고 대신 2000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지역발전에 쓰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주민소환 대책위를 주축으로 한 반대 측 주민들은 "광역 화장장을 포기하지 않으면 주민소환으로 심판하겠다"고 맞서 왔다.

◆선관위 항소 여부 관심=선관위는 항소 여부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일단 항소심 결정 때까지는 주민소환 투표 일정이 중지되고, 항소심 재판부가 1심 판결을 뒤집고 선관위의 손을 들어줄 경우 투표 일정이 재개된다. 그러나 김 시장 측이 대법원에 상고할 경우 확정판결까지 주민소환투표는 상당 기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관건은 주민소환대책위가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아 주민소환을 추진하느냐다. 이 경우 주민 서명도 전부 다시 받아야 한다.

대책위 관계자는 "서명부 작성과 제출에 대한 모든 것을 선관위와 협의해 진행했는데 이런 판결이 나오니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하남시는 이번 판결로 주민소환투표 절차가 중단되고 김 시장이 직무에 복귀함에 따라 광역 화장장 유치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검토 중이다.

하남=정영진 기자, 주정완 기자

◆주민소환제=선출직 공직자를 주민의 투표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제도. 투표를 청구하려면 일정 비율 이상의 주민 서명이 필요하다. 특별.광역시 시장과 도지사를 소환하려면 투표권자의 10% 이상, 지방 시장과 군수.구청장을 소환하려면 15% 이상의 주민이 서명해야 한다. 투표권자 3분의 1 이상 투표와 유효투표 과반수의 찬성으로 이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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