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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박 대통령에도 욕 퍼부은 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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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놈이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이 XXX 놈아. 니가 갖다 쳐먹어라.”

손님이 물을 청하자, 물 대신 걸쭉한 욕이 돌아온다. 경기도 포천 광릉수목원을 지나쳐 고모리 저수지 입구에 있는 한 식당. 대한민국 대표 욕쟁이 할머니 식당답게 상호도 아예 ‘욕쟁이 할머니집’이다. 그런데 이 집에 들어서는 손님들은 이 욕에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눈을 치켜뜨지 않는다. 말대꾸 한마디 하는 법이 없다. 그저 살살 눈웃음으로 응대할 따름이다.

식당 안의 몇 가지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5천원에 스무 가지가 넘는 찬이 담긴 상. 직접 담근 장을 써서 맛을 내는 전통 조리법. 여기에 식당 벽에는 반가운 소식도 붙어 있다. ‘10년 후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습니다.’ 이 모두가 식당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욕이 그냥 단순한 욕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나이가 들어 요즘에는 식당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 욕쟁이 할머니는, 이내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내 욕먹으면 3년간 부자 돼. 내 욕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데...XXX 놈들.”

경기 포천에서 강원 묵호, 그리고 전남 구례에 이르기까지 욕쟁이 할머니 식당 하나 없는 도시는 없다. 돈을 내고 욕을 먹는 이런 식당치고 손맛 없는 곳 또한 없다. 그래서 어디서나 욕쟁이 식당은 지역 명소다. 전북 전주 지역에서는 콩나물 국밥 전문 삼백집이 욕쟁이 할머니 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 곳 주인 할머니는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욕을 했다. 전주 시찰을 나왔다 이 식당 근처에 들른 박 전 대통령은 국밥을 배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수행원들은 욕쟁이 할머니한테 잔뜩 욕만 먹고 돌아왔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식당에 들렀다. 그를 본 욕쟁이 할머니가 ‘니는 어쩌면 그렇게 박정희를 닮았냐? 옜다, 그런 의미에서 계란 하나 더 먹어라’라고 외쳤다던가?

전국 욕쟁이 할머니 식당의 할머니들은 왜 욕을 먹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 할머니 욕에 악의 대신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을 손님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욕은 우리 전통 문화의 하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욕은 일종의 법률 용어집인 '이언각비'에서 ‘추악한 말로 꾸짖는 것을 욕이라 하고, 욕이 하나의 풍속’이라고 규정했다. 더욱이 욕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잘 발달된 분야 가운데 하나다.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김열규, 사계절 출판사)'에서는 ‘욕이 가장 흥청대는 분야는 탈춤’이라면서, 욕 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욕도 잘만 하면 꿈이 된다. 못 다 이룬 꿈. 꺾이고 짓눌린 자들의 못다 이룬 시퍼런 꿈이 된다.” 세계의 욕 문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www.insultmonger.com)에는 우리 욕 가운데서도 비교적 저급하거나 부정확한 욕을 담고 있다. 우리 욕이 주한미군 등을 통해 미국에 전파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다 전통적이면서 풍부한 욕은 '국어 비속어사전(김동언, 프리미엄북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사전은 무려 1천1백 쪽이나 된다.

지금 세간의 화제가 된 욕 세 구절이 있다.

“월드컵 스타라더니 2군 경기에서 뛰고 있냐? 몸값이 아깝다.”
“쪽 팔려서 세리모니 안 하냐? 반지 (세리모니) 해야지.”
“마누라만 예쁘면 다냐?”

지난 11일 K-리그 2군 서울FC와 수원 삼성간의 경기에서, 서울의 서포터스들이 수원의 안정환 선수에게 한 욕이다. 강도로만 보자면, 욕쟁이 할머니들에 비해, 그야말로 새 발의 피 격이다. 그런데도 이 욕에는 욕쟁이 할머니의 애정이 없다. 증오만 잔뜩 묻어나는 야유다. 축구와는 관련 없는 사생활 비난과 인신공격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다. 욕 한 마디 없는, 지독한 욕인 셈이다.

물론 야유에 발끈하고 관중석으로 뛰어든 안 선수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가 했다는 욕에도 짜증 섞인 증오가 묻어난다. “뭐라고 했어?...너 같은 애들 때문에 K-리그가 안 되는 거야. 알아?”(일부 방송은 ‘애들’이라는 말을 ‘삐이’로 처리해 더 심한 욕설을 연상시켰지만, 그가 한 말은 그냥 ‘애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서 내뱉은 말치고 최악은 아니었다. 안 선수가 일방적으로 비난받거나 징계 받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번 안정환 선수 사건을 포함해 대통령과 야당, 대선후보들, 그리고 언론 간에 던지는 말들이 이런 증오 섞인 야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1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신정아와 정윤재 관련 의혹에 대해 ‘깜도 안 되는 의혹이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그 5일 전에는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현 정부를)깜도 안 되는 정권’이라고 맹비난했다. 강도는 높지 않지만 증오로 일그러진 야유다. 우리 사회 이해집단간의 성명이나 논평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실버 축제에나 등장하는 욕쟁이 할머니, 또 최근 들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욕쟁이 할머니 식당의 애정 어린 욕이 그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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