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45. PET 상용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1994년 한 과학자가 PET로 뇌 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오른쪽 네모 안은 뇌 영상.

PET의 상용화는 워싱턴대에서 개발한 육각형과 내가 개발한 원형 PET가 각각 추진되고 있었다. 상용 시스템은 내가 개발한 PET가 먼저 테이프를 끊었다. 나와 함께 UCLA에서 PET를 개발했던 에릭슨 박사에 의해서다.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대학에서 나와 함께 UCLA로 왔었다. 내가 1978년 UCLA를 그만 두자 그 역시 스웨덴으로 돌아가 ‘스캔디트로닉스’라는 회사를 차려 PET 상용제품을 처음으로 내놨다.

핵 검출기가 96개 짜리였다. 내가 처음 개발했을 때는 64개였으나 그가 늘린 것이다. 그때가 80년쯤일 것이다. 물론 기술료를 내거나 그 기술로 상품을 만든다며 내게 밥 한끼 산 적이 없다. 에릭슨 박사도 PET 개발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술에 일정 지분은 있다. 그래도 내가 연구 책임자고, 가장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만약 어떤 대가를 지불해 한다면 나에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절차는 없었다. 내가 데리고 있던 연구원이 나가서 회사를 차린다고 하니 안 도와 줄 수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나하고 동고동락한 게 10년 가까이 되는 데다 참 성실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첫 개발한 PET를 자신에게 줄 수 없느냐고 했다. 그러나 내 아이디어와 피땀이 스며 있는 것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가끔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기꺼이 그를 도왔다. 진심으로 회사가 성공하길 바라기도 했었다. 내가 실험실에 가지고 있던 핵 검출 부품인 비지오(BGO)를 보내주기도 했었다. 비지오는 그 당시 다이아몬드 값만큼이나 비싼 부품이었다. 그것도 그냥 보내준 것이다.

나는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파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다. 누구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잘 되어야 어느 모임에 먼저 밥값이라도 내려고 할 것 아니냐라는 생각에서다. 에릭슨 박사 역시 성공하면 나에게 득이 되면 되지 해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캔디트로닉스에서 나온 첫 상용 PET은 화질이 나빠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검출기의 숫자가 적은 데다 좀더 정교한 영상처리기술이 필요했었지만 그렇게 만들지 못했다. 지금의 상용 PET의 핵 검출기는 1만여개나 된다. 핵 검출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영상의 품질은 좋아진다.

스캔디트로닉스는 결국 미국의 제너러일렉트릭(GE)에게 팔렸다. GE는 그 기술을 바탕으로 82년 경 비지오를 이용한 새 모델의 PET을 내놓았다. 이를 계기로 의료기 시장에는 PET 신제품 경쟁이 일었다. 미국 테네시에 있던 시티아이, 필립스, 커티시 오브 포지트론 등 여기저기서 PET를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커티시 오브 포지트론에서는 워싱턴대의 PET 기술을 받아 제품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시장에서 참패했다. 영상이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았고 기기를 사용하기가 까다로웠다. 분자 수준에서 인체 영상을 볼 수는 있는데 흐릿했다. 그리고 너무 비쌌다. 처음 몇몇 병원에서 사가기는 했으나 구매가 이어지지 않았다. 한번 써보니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기는 그 신뢰성과 의사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살아 남는다. 결국 이들 회사들은 PET 사업을 접다시피했다. 그 사업 부문 임원들은 다른 부서로 전출가거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