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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산부 환원론 청와대선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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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혁 흠집낸 농안법 유보… 손발 안맞는 유통정책/관료 복지부동·중매인 응징 병행/청와대/중매인에 도매행위 인정 불가피/농수산부
농안법 파동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해당부서인 농림수산부가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정부도 발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는 농안법의 시행을 6개월 연장한 것을 계기로 차제에 농산물 유통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게끔 농안법을 전면 재개정해야 한다고 나섰으나 농림수산부는 종전처럼 중매인들에게 도매기능과 중개기능을 모두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환원론을 되뇌고 있다.
○…농안법 시행 6개월 유보조치로 트레이드 마크였던 「개혁」에 치명상을 입은 청와대가 두가지 방향에서 사태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하나는 개정 농안법에 연연할게 아니라 제대로 된 「새」 농안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점을 옳게 파악하지도 못한 개정 농안법에 매달리기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농산물 유통구조를 진짜 개혁할 수 있게 농안법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명분에 집착할 게재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문민정부를 망신시킨 농림수산부 관계자에 대해서는 문책조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또 다른 측면에서 정부의 스타일을 구기게 한 중매인들은 물론 다른 시장 관계자들의 세금포탈 등 문제점도 차제에 밝히고 나간다는 방침이다.
청와대가 민자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농안법의 재개정을 추진하려는 것은 개정당시 시장구조에 대한 기본조사가 틀려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고백이다.
개정 농안법이 중매인들을 주로 겨냥하고 있는데 이는 뒤얽혀 있는 먹이사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 고위당국자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이 중매인외에 지정도매법인·소매상 등으로 구성돼 이들이 뒤엉켜 총체적 비리를 저지르고 있음에도 중매인제도만 고친다고 해서 유통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중매인들을 중심으로 알려진 문제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정부가 명분에 매달려 개정 농안법을 고집하다가는 아무 일도 될게 없다는 설명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법 시행 1개월전인 지난 4월초 청와대가 농림수산부에 대책수립을 당부했음에도 하나도 준비된게 없었다는 것.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타성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도 단호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른 고위관계자는 5일 밤 시장 상인들을 만났더니 『정말 관료들이 유통구조를 개선할 생각이 있었다면 시장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하더라며 관료들의 무사안일에 경종을 울리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농안법 시행 6개월 유보의 책임을 걸머진 농림수산부는 여전히 「현실론」에 집착하고 있다. 요컨대 개정 농안법의 핵심인 중매인들의 도매행위를 대신할 대안이 없다는 주장이다.
가락동시장의 경우 하루 반입물량 8천여t중 소매상의 의뢰를 받아 단순히 중개해주는 물량은 20%인데 비해 나머지 80%는 중매인들이 자기 돈으로 일단 사들였다가 소매상들에 나눠주는 도매행위로 처리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중매인들의 도매행위를 금지시킨 개정 농안법을 도저히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다는 입장.
실무책임자격인 김정룡 제2차관보는 『중매인들의 도매행위가 중단될 경우 도매시장에 올라온 물량을 소매상들에 빠른 시간내에 분산 배정해주는 기능을 대신할 대안이 없으며,따라서 중매인들에게 종전처럼 도매와 중개를 모두 인정해주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농안법 개정이 처음 거론된 지난 91년이후 3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중매인들의 매점매석이나 가격조작 등으로 인한 유통구조의 왜곡을 알지만 대안이 없으니 농안법을 재개정하는 수 밖에 없다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김현일·손병수기자>
◎“당이 정부에 밀렸다” 속끓는 민자/“집단이기주의에 밀려 어떻게 제도 개혁하나”/청와대만 상대한 농수산부에 분통
『당이 전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림수산부가 일방적으로 조치한 것이다.』
중매인들의 집단행동으로 농안법 시행을 6개월 유보하기로 한 정부 결정이 있은지 하루가 지난 6일 아침 민자당 이세기 정책위 의장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개혁차원에서 야심작으로 내놓은 농안법이 중매인들의 실력행사에 밀려 좌초되자 제안자인 민자당은 몹시 허탈해하고 있다. 더구나 총리경질 파동후 당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시점에서 『당이 정부에 밀렸다』(이 의장)는 자괴감이 당내에 깔려있는 것이다.
특히 청와대가 6일 아침 농안법을 농산물 유통질서의 개혁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재개정한다는 입장의 변화를 보였는데도 민자당은 이 내용조차 모르고 있어 위상제고는 커녕 철저히 뒷북만 친 셈이 됐다.
민자당으로선 『분통터지고 맥빠질 노릇』(정책위 실무관계자)이다.
이번 농안법 파동에 대해 민자당이 우려하는 것은 「개혁이 집단이기주의에 무릎을 꿇었다」는 개혁 한계론과 공무원사회의 복지부동.
이 의장과 이 법의 추진 실무자였던 신재기의원은 『행정부의 준비부족으로 개혁법 집행이 차질을 빚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민주계의 농촌출신 박경수의원은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개혁입법이 물러서면 개혁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며 『어차피 한번은 기득권을 가진 중매인들의 반발을 겪어야 할 문제인데 정부가 너무 쉽게 유보했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농림수산부가 보완대책을 제대로 챙겼으면 불과 1천5백명밖에 안되는 중매인들이 고개를 숙였을 것』이라며 농림수산부 관계자들의 행태를 「복지부동의 표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중매인뿐 아니라 진짜 큰손인 지정도매법인까지를 포함시킨 전면 개정을 들고 나옴으로써 개혁의지 쇠퇴주장은 근거를 잃고 있다.
6공 고위공직자 출신 한 의원은 『돌출 현안에 대한 수습방식에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라면서 『사람을 자르는 인적개혁은 쉽지만 제도개혁의 어려움을 문민정부도 실감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핵·우루과이라운드(UR) 사태에 이어 이번 파동을 교훈삼아 정부의 국정운영관리체제의 재검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런 평가에 대해 많은 의원들은 동감하고 있다.
현안에 대해 거의 침묵하던 김종필대표까지도 『이런 식으로 되면 앞으로 다른 개혁입법에도 차질이 우려된다』고 걱정했다.
김 대표는 6일 오전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김영삼대통령에게 당의 입장과 분위기를 보고했다.
특히 당은 또 이번 파동에서 농림수산부가 청와대와의 「직거래」를 통해 농안법 유보조치를 끌어낸데 대해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민자당 정책관계자는 『농림수산부가 일이 안되니까 당을 제쳐놓고 청와대와 거래해 일을 처리하려 한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이영덕총리가 지난 2일 당을 찾아와 「긴밀한 당정협조」를 자청한 것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게 민자당의 불만이다.
이 의장은 『물론 농림수산부가 UR협상으로 정신이 없었음은 인정한다』면서 『그러나 유보기간 1년을 허비한데 대해 책임소재는 농림수산부 스스로라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
그러나 이 의장이 『재개정 불가』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청와대에선 『개혁차원에서 전면 재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혀 또다시 당을 뒷북치게 만들었다.<김기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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