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도보여행가 김남희의 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누구나 한번쯤 그런 꿈을 꾼다. 어느 날 문득 멋지게 사표를 날리고, 방 보증금을 빼고, 얼마 안 되는 적금까지 탈탈 털어 미지의 세계로 확 떠나버리는!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 누가 선뜻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가녀린 체구에 소심하고 겁 많으며 까탈 또한 잘 부리는 예민한 여자라고 한다면 더더욱 먼 얘기다.
하지만 여기, 스스로를 ‘까탈이’라 일컫는 용감무쌍한 여인이 있으니 그 이름은 김남희. 혈혈단신 배낭 하나에 의지해 지구 곳곳을 쏘다니는 놀라운 여자다. 여덟 살 때, 포항에서 대구까지 홀로 기차를 타고 갔던 첫 여행의 황홀함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김남희. 대학을 졸업하던 해, 펼쳐진 인생이 막막해 유럽으로 몇 달간 여행을 떠난 것이 화근(?)이었을까. 그 길로 여행 중독자의 대열에 합류해 틈만 나면 한 나라씩 정해놓고 도보여행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들은 일평생을 꿈으로만 간직하는 그것(사표를 내고 방을 빼고 적금을 털어 여행을 가는 것)을 실행에 옮기고, 걸어서 지구를 다 돌아보겠다는 포부에 경운기를 얻어 타는 것조차 반칙으로 생각하는 고지식한 여인. 국토종주기에 이어 스페인 여행기 에세이, 수많은 아시아 국가를 거치는 도보 여행기를 보는 내내 ‘이 여자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며 그녀의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를 얼마간. 그녀가 여행 도중 잠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만나러 갔다.

삼청동의 조용한 카페. 시골 인심 한 조각도 잊지 못하고 내내 맘 쓰는 그녀의 소심한 성격으로 보아 약속시간에 늦을 턱이 없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커다란 테이블에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는 새하얀 얼굴의 여인이 있을 뿐인데 혹시나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 세상에 바로 그녀다. 더벅머리에 새카만 얼굴을 상상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농을 거는 기자에게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그렇게 됐다며 쑥스러워 한다.
소녀 같은 딸이 허허벌판 방랑자로 살아가니 그 어머니 맘은 어떨까 싶으면서도 안타까운 맘보다는 시기질투의 심보가 저만치 앞선다.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에 오른 잘생긴 남자들의 정체부터 추궁했더니 이내 웃음보를 터뜨린다. 길 위의 친구들을 오래토록 기억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올렸다는 것. 이역만리 구석구석을 활보하는 그녀에게 인터넷 홈페이지는 한국의 지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위치를 수시로 알릴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다.
웬만해서는 걷기 이외의 수단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게 된 사연을 물으니, 출판사에서 공짜 티켓을 준다고 해서 얼씨구나 달려 왔는데 사인회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 있더란다. 숫기 없는 성격으로 사인회를 치르느라 다소 고역이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여행수기가 제법 팔린다니 즐거운 눈치다.
그나저나 무전여행 광신도인 워크홀릭 기자와 도보여행 수호신 김남희가 만났으니 사단이 났다. 그 새 죽이 맞아 수다를 떠느라 인터뷰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 무리해서 걷다가 발톱이 빠졌던 얘기를 먼저 꺼내니 “뭐 저도 가끔 발톱이 빠지더라고요?”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김남희. 인도 여행 때 간디의 청렴했던 생활기를 그대로 따라했다가 큰 고생을 했던 일이며 숙소를 구하지 못해 에펠탑 밑에서 배낭족 무리에 끼어 노숙했던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흥이 오른 기자, 그리스 항구에서 집 없는 개들과 함께 노숙했던 일화를 꺼내들며 그녀의 맞장구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차분한 음성으로 돌변한 그녀의 안전수칙. 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전하고 깔끔한 숙소에서 심신을 풀어줘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하지만 고급 호텔보다는 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을 골라 다니며 신선한 만남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만의 여행 비법이랄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만남을 묻는 기자에게 한참을 묵묵부답인 그녀, 갑자기 떠올리려니 너무 많다며 뜸들이더니 ‘산(山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독일남자’ 얘기를 시작한다. 걸음마를 뗀 후부터 지금까지 산에 오르는 것을 낙으로 여긴다는 독일청년. 해외토픽에 오를만한 암벽사고를 당하고도 변함없이 산을 사랑하는 그 열정과 집중력이 부럽단다. 무르익은 분위기를 놓칠세라 여행 중의 로맨스를 캐물었더니 독일 청년처럼 멋진 사람을 만나도 도보여행을 끝까지 다 완수하지 못할까봐 엄두를 못 낸다니, 과연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여성의 전형이 아니고 뭐겠는가.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셔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라고 할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이렇게나 여린 사람이 눈보라를 헤치고 산을 올랐다는 것이, 폭염을 이겨내고 사막을 건넜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뿐이다.
눈보라 얘기가 나오니 네팔에서 경험했던 최고의 순간을 추억하는 그녀, 네팔 안나푸르나 코스 중에서 5400미터의 위용을 자랑하는 난코스에 올라 수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눈 밭 위를 끝없이 걸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인다. 이러다 죽는 건가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설원을 벗어나니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자갈길이 나오는데 그 앞으로 푸른 보리밭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더란다. 그 풍경을 마주하고 한참 서서 언제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꼭 보여줘야지 다짐했다고 한다. 언제고 그런 곳을 찾아 정착하겠다는 소릴 들으니 이 여인은 떠돌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정착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제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를 짓는 게 꿈이라는 그녀. 머릿속에 모든 계획이 다 있는데 돈만 없다며 능청이다. 궁궐처럼 멋있게 설계하려 했던 비현실적인 계획을 조금씩 수정하여 지금은 버려진 집이라도 알뜰히 수리해서 시작하고 싶다며 들떠 있다.
그런 그녀가 다 양보해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 하나, 그건 바로 자신의 집을 찾는 손님들은 누구라도 숲을 걷고 냇물을 건너고 나무를 만지며 그렇게 한참 걸어야 한단다. 사람들은 무모한 계획이라며 나무라지만 아무나 오는 집을 갖는 건 싫다는 그녀. 흙을 밟는 기쁨을 알고 숲과 대화 하는 법을 아는 손님들만 초대할 계획이라는데 걷는 일에 익숙지 않은 요새 사람들이 그녀의 마음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남들이 뭐라고 하건 앞으로도 더 열심히 여행하겠다는 김남희. 언제고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 정착하고 많은 사람들을 숲으로 불러들여 걷게 하고 웃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꿈꾸는 행복한 삶이다.

김남희의 개인 홈페이지 ‘하늘 길 걷는 사람’ 에 가면 그녀의 여행길에 함께 오를 수 있다. http://www.skywaywalker.com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