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음악으로 정치를 했던 지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하프너 지음
이기숙 옮김, 마티
760쪽, 3만6000원

 

 ‘예술이 정치를 초월할 수 있는가’라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예술가가 얼마나 될까. 예술은 자신이 잉태된 사회와 그 주요 요소인 정치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기 마련이라지만 역사는 예술이 그다지 순진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예술을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은 거의 항상 있었고, 상당수 예술가는 정치가 주는 달콤한 지원에 빌붙고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책은 나치 독일 하에서 예술이 정치를 초월할 수 있다고 역설했던 세계적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의 평전이다. “유사 이후 최고의 음악 해석자”라는 평을 들으며 베를린 필과 빈 필 등 명망 있는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직을 휩쓸던 그는 말했다.

“바그너와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이면 인간은 어디서나 자유롭습니다. 음악은 비밀경찰이 손대지 못하는 곳으로 인간을 데리고 가니까요. 나치 정부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나는 나치 지휘자이고, 민주주의자 밑에서는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은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예술은 모든 우연한 정치적 사건 너머에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히틀러 앞에서 지휘대에 오르고 괴벨스의 문화원로원 의원, 제국 음악국 부의장을 지냈던 그의 행적은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유대인 연주자를 보호하는 데 애쓰고 나치를 위한 공연을 피하려 꾀병을 부리며, 반민족적 작곡가로 낙인 찍힌 힌데미트를 옹호하는 글로 괴벨스와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치의 대외선전 정책에 봉사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현대 음악 전문가인 저자는 “예술과 정치를 떼어놓으려 했으나 음악으로 정치를 했던 사람”이라고 질타한다.

 책은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혼외 자녀가 여럿이고, 어렸을 때 작곡을 했다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은 인간적인 면모도 소개한다. 책값 뿐 아니라 두께가 만만치 않고 클래식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지루하게 느껴질 책이긴 하다.

 백일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