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아들이 설거지하면 기겁하는 당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사례 1. 전업주부 W의 가족은 W와 남편, 초등 1년생 아들 이렇게 셋이다. 이 집의 화분 물주기는 남편 몫이다. W는 화분에 물 주는 날짜나 요일을 정해줬다. 가령 매달 1일은 산세베리아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다. W의 남편은 과연 매달 1일 잊지 않고 산세베리아 화분에 물을 줄까. 대답은 ‘아니오’다. W는 매달 말이 되면 남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1일 날 화분에 물을 줘야 한다’고 알려준단다.

사례 2. 결혼 4년 차에 접어든 한 후배 부부. 이들은 신혼 초부터 집안일을 세분화한 뒤 일일이 점수를 매긴 목록을 만들었다. 예컨대 ‘전기청소기 돌리기’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보다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하므로 점수가 높다. 그런 다음 총점이 같아지도록 가사를 나눴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많은 집안일을 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이혼 사유의 90%는 ‘성격 차이’나 ‘경제적 문제’다. 하지만 미래사회에서는 ‘가사분담 불이행’도 무시하지 못할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사례 2의 부부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결혼식에서 “신랑 ○○○군은 신부 ○○○양을 아내로 맞아 평생 집안 일을 평등하게 나눠 할 것을 맹세합니까”라고 주례가 다짐을 받는 풍경이 연출될지도 모른다.

가사분담은 근본적으로 참여자의 양심과 자발성에 기대야 하는 취약한 속성을 갖고 있다. 남편과 아내 중 상대적으로 덜 양심적이거나 덜 자발적인 사람이 게을리하면 그뿐이다. 남성들의 유전자에는 사실 ‘집안일을 해야 한다’라는 정보가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그들의 주 업무는 사냥이었지, 육아와 가사가 아니었으니까.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는 헌신적인 어머니를 보고 자란 것도, 그들에게 집안일이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드는’ 수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어려서부터의 교육이다. 아들 가진 엄마들은 이를 남녀평등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로 접근해 보면 어떨까.

지금의 아이들이 커서 가정을 이루게 되는 미래에는 남자들도 요리나 세탁·청소 등을 잘하지 못하면 배우자 찾기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행여 운 좋게 가사분담에 대한 의지나 소질이 부족함을 숨긴 채 결혼했다고 해도 원만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걸레질도 시키고, 밥상에 숟가락도 놓게 해야 한다.

얼마 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유주(채정안)가 한성(이선균)에게 청혼하면서 “나랑 결혼하면 찬물에 손도 넣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저런 청혼이 현실에서 벌어질 날도 머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아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들이 손에 물 묻히며 산다고 가슴 아파할 일, 전혀 아니다.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