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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새롭게 봐야 할 미국’ 말하는 김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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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이 쉰이 넘도록 해외에 나가지 않아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지하(66) 시인이 최근 세계여행기를 출간했다. 미국.아시아.유럽 등지를 여행한 얘기다. 그는 국제관계에 있어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신문명,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지하가 변했다"는 비난도 일었다. 경기도 일산 자택으로 찾아가 그의 생각을 들었다.

‘최후의 국내파’ 김지하(66) 시인이 최근 세계여행기를 출간했다. 제목은 『예감』. 미국·아시아·유럽 등지를 돌며 그가 감지한 인간과 신, 역사와 미래의 통찰과 예지를 묶어 냈다. 책 5분의 1이 미국 얘기다. 출간에 즈음해 연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미국 얘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에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기 때문이다. <본지 8월 15일자 2면> 이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심지어 “김지하가 맛 갔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나왔다. 사실 그가 이런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 출옥 후 생명운동에 몰두했을 때도,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91년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칼럼을 기고했을 때도 그랬다. 일산 자택에서 만난 그가 처음 꺼낸 말도 요즘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기자에게 대뜸 “미국 얘기한 것 가지고 인터넷에서 욕하고 있다던데, 그건 가라앉았나”라고 물었다. 이어 그의 생각을 찬찬히 풀어갔다. 말이 차분하고 나직했다. 그리고 길었다.

-왜 소위 ‘친미발언’을 했나.

“나를 친미파라고 하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주변 정세 치고 한국처럼 괴상한 나라가 없다. 남북이 찢어진 데다 4강이 붙어 있으니. 반미가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국을 믿는 것도, 일본을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 보는 것도 잘못이다. 이 복잡한 작은 동네를 활용할 수 있어야 우리가 평화 속에서 제대로 먹고산다.”
 
-‘김지하가 변했다’는 말도 나온다.

“과거 난 반미라고 앞에 내세워 미국을 욕한 것은 아니다. 당시 학생운동·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의 일반적 담론은 제3세계론, 미국의 경제적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자주적인 민족경제 발전과 민주화와 관련해 미국에 비판적 태도를 갖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후 제3세계론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이제 동아시아론이 중심이 됐다. 이 입장에서는 미국이란 존재가 재평가돼야 한다. 덮어놓고 제국주의·식민주의라고 말을 꺾어버릴 차원은 아니다.”

(그는 도리어 “올 초 반미·반FTA 난리하다가 평양과 워싱턴이 가까워지자 싹 죽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신문명, 네오 르네상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

“미국은 과학, 한국은 사상에서 잠재력이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만남이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여는 열쇠는 현재의 철학적 입장이다. 중국의 경우 유산은 풍부하지만 현재적 입장이 부족하다. 짝퉁이나 만들고 역사 왜곡이나 하고 있지 않나. 일본은 과거의 콘텐트도 부족하지만 침략국가라는 부채가 있다. 한국이 가능성 높다.”

-500여 쪽에 달하는 이번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곳곳을 떠돌며 한국과 아시아 르네상스의 도래를 봤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해발 1500m 이상 고도의 산정호수에 형성된 고대도시의 시장이었다. 사원 앞 시장은 성(聖)과 속(俗)이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시장경제의 교환 가치를 인정하면서 평등과 복지를 위한 호혜의 가치를 살릴 길이 거기 있었다. 혼돈에 처한 인류문명의 활로를 그곳 신시(神市)에서 찾았다.”

-해외에 나가지 않아 ‘최후의 국내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 “조국의 민주화를 기다려야 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썼다.

“과거 민주화운동 하던 이가 해외에 가면 조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정부를 욕하거나 칭찬해야 했다. 밖에서 자기 조국에 대해 시비 거는 것은 내게 맞지 않았다. 안에서는 싸우더라도 밖에 나가서는 칭찬은 못할지언정 주의는 하는 게 성숙한 자의 태도라 봤다. 그러니 나갈 수가 없었다. 때가 오지 않았던 것이 문제지만 과거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다. 우리의 삶은 지구적인 삶이다. 바깥으로 나가 크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오기로도 읽힌다.

“그렇다. 나는 덮어놓고 유럽 찬양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본다. 동양·동아시아·한국이 가진 근본적 가치를 깊이 생각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창조적 결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지금은 우리가 정신적 식민주의를 벗어났나?

“글쎄, 그런 건 답하기 곤란하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 것이라 해서 다 좋은 것도, 남의 것이라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라는 태도다. 상식적인 태도, 제정신이라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계 보편화의 전제는 로컬라이즈, 즉 우리의 언어와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선생은 자주 변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감옥에서 나올 때부터 그랬다. 생명운동 할 때는 생명교 교주라고들 욕했다. 다 소용없고 아무 책임 없는 비판이다. 문학도, 사는 것도 다 표리(表裏)가 있다. 이면에 숨은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내가 22세에 쓴 ‘황톳길’은 민중시의 시작이었다. 생명과 죽음 사이의 문제였다. 표면엔 저항, 이면엔 생명사상이 깔려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 이 생명의 문제를 추구했다. 오랜 감옥살이로 내게는 부드러운 것, 생명이 결핍돼 있었다. 맨날 똑같은 소리 하면 사람은 전부 퇴보해 버린다. 변화는 결핍에서 온다. 결핍을 채우며 가는 게 진화이고 성장이다. 만족했으니 이제는 다른 거 하겠다며 변화하는 사람 많지 않다. 부족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거다.”

-가장 큰 비판은 아무래도 91년 일간지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글에 대한 것이었을텐데.

“내가 그때 비판하고 나서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뚝 끊겼다. 김이 새 버린 것이다. 당시 이념적으로 정권을 뒤엎을 생각만 했지 생명에 대한 관점이 없었다. 몇 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강연을 마치자 운동권 출신이라는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그 칼럼을 증오했었는데, 공부하다 보니 선생 얘기가 이해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내 얘기를 알게 된 게 아니라 당신이 철이 든 것’이라고. ‘보소, 사람이 늙다리 된다고 다 매력 없는 건 아니다. 나이 들면서 깨닫고 그게 어른이 되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무슨 판단을 내릴 때는 늘 ‘사람 목숨이란 게 그리 간단치가 않은 거구나’ 하는 존중이 바탕이 돼야 한다.”

-선생은 예순 여섯이다. 늙는다는 건 어떤가.

“나는 나이 드는 것에 슬프지도, 뭔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혼자 간다는 생각은 자꾸 한다. 예전에는 감옥도 같이 가고 행동도 같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외롭다. 외롭더라도 내 할 일 하고 내 갈 길을 간다. 전에는 남이 호응해 주지 않으면 굉장히 기분 나빴다. 외롭지만 남이 박수 안 쳐줘도 간다. 안 가면 어쩔텐가. 내가 다시 젊어질 수도 없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늙어서 뭔가 판단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서 결론 난다.”

-선생은 젊은 시절 시대에 맞서 가장 젊은이답게 살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게 보나.

“요즘 말로 아주 싸가지가 있다고 본다.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를 보자. 신명과 관용이 뭔지 온몸으로 보여줬다. 신명은 우리 고대 축제 때부터 있던 것이다. 젊은이들이 한 많은 그늘을 제치고 그 신명을 끌고 올라왔다. 가능성 있는 세대다. 우리 나이 사람들은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게 이거 아니냐’라고 해석하고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요즘 문화계가 학력 위조로 난리다. 선생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다.

“(씨익 웃으며) 솔직히 얘기해서 이놈의 사회는 그게(학벌이 좋은 게) 편해. 그게 문제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국졸이나 고졸 학력으로 그만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만큼 일한 건 칭찬할 일 아닌가.”

-타이틀 집착, 거짓말은 문제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고생이 있지 않았겠나. 파리 때려잡듯 다 잡으면 어떻게 하나. 무엇보다 스스로 그런 것에 콤플렉스를 안 가지는 게 중요하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김지하는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

1970년대의 김지하는 ‘오적(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였다. 각각 70년 『사상계』와 75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된 두 시는 그를 반(反)독재 투쟁의 ‘뜨거운 상징’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김지하는 구속과 석방, 도피와 재구속을 반복해야 했다. 유신정권이 끝난 80년에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84년 사면 복권됐다.

80년대부터 김지하는 ‘생명사상’에 몰두했다. 동학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한 ‘율려사상’ ‘신인간운동’을 주창했다. 시에서도 격정과 의분의 외침 대신 축약과 절제, 관조가 두드러졌다. ‘저항시인’ 김지하의 이러한 변화는 ‘변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91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란 글은 그를 둘러싼 갑론을박의 정점이 됐다.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래 열병처럼 번지던 운동권의 분신 투쟁을 나무란 이 글로 그는 완전히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당하는 등 진보 지식인 그룹에서 소외됐다. 하지만 주위 반응이야 어떻든 김지하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

▶본명 김영일 ▶1941년생 ▶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75년 ‘제3세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터스 특별상 수상 ▶81년 세계시인대회 ‘위대한 시인상’,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영남대·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