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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기자실 폐쇄의 반민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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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정부가 기자실에 ‘대못질’을 해버렸다. 중앙부처뿐 아니라 금융감독원, 일선 경찰서 등에 기자실이 없어지고 기자의 출입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이에 기자들은 “정부의 취재 통제를 즉각 철회하라”며 기자실 이전을 거부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도 “기자실 폐쇄는 열린 사회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자실 통폐합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때마침 후텁지근한 날씨도 계속돼 국민의 불쾌지수는 더욱 높아진다.

논의 수준은 머리를 더욱 무겁게 한다. 언론계에서는 ‘언론 통제’, 심지어 ‘5공보다 지독한 언론 탄압’이라고 항변하고 있는데, 정부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고 자랑한다.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입에 쓰지만 몸에 좋으니 먹으라는 태도다. 보수·진보, 신문·방송, 온라인·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언론계 전체가 반대하고 나서자 이를 기자들의 특권 의식으로 몰아가려는 분위기도 있다.

하지만 기자실 통폐합과 취재원 접근의 제한을 특혜 폐지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론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므로 언론사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에 포함된다는 것이 헌법학계의 다수 견해다. 언론사는 보도를 위해 취재를 하고, 취재는 취재원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된다. 결국 언론사가 취재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언론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처럼 언론의 자유의 한 내용으로 언론사의 자유, 그 내용으로 취재의 자유를 이해하면, 정부가 언론사의 취재 편의를 위해 기자실을 제공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헌법상 부여된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의 이행이라고 할 것이다.

복잡해 보이는 이번 사태는 사실 간단한 것이다. 본질은 민주국가에서 어떻게 정책을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기자실의 존폐 문제는 그 포장일 뿐이다. 포장을 화려하게 만들다 보니 ‘선진화’라는 용어가 들어가고, “정부 기자실, 선진국에는 없다”는 제목의 글이 국정 브리핑에 몇 달 동안 게재되는 것이다.

‘있다, 없다’의 논쟁은 TV 오락 프로그램처럼 논의를 희화화하고 저급하게 만든다. 미국·일본 등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많이 끼치는 나라에 기자실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나라의 수를 일일이 세어 숫자로 승부하겠다는 발상이 우습다. ‘있다, 없다’는 현상의 진단일 뿐 그러한 현상이 어떠한 배경에서 일어났는지를 검토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다. 기자실 존재의 실태조사는 그 나라 정부가 국민에게 정보를 얼마나 공개하는지 함께 검토할 때 의미를 가진다.

기자실 통폐합 논쟁은 민주국가에서 주요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사고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핵심은 정부 정책이 결정되기 전에 국민이 그 내용을 알 필요가 있는지에 있다. 조율되지 않는 정책 정보의 유통은 사회적 혼란만 가져온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고, 확정되지 않은 정책이라도 국민은 이를 알 필요가 있고, 이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언론계의 입장이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정책은 확정될 때까지 보안이 유지돼야 한다. 확정되지 않은 정책을 기사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자와 공무원을 격리해야 하고, 정부 부처 안에 있는 기자실을 폐쇄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에 서면 국민은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정부는 자기 하는 일을 국민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언론은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국민에게 알리고 여론을 정책에 반영하는 일을 담당한다. 따라서 기자는 공무원과 수시로 만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촉진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기자실은 그러한 제도 중 하나다. 전자는 관 주도의 후진국가이고, 후자는 국민 참여의 선진 민주국가다. 어느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문재완 한국외대 교수 · 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