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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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19) 아궁이 쪽으로 등을돌리고 앉아 시려운 엉덩이를 불에 쪼이면서 송씨가 중얼거렸다.
『모르겠다.이러네 저러네 하지만,네 어미는 이제 발뻗고 자기는 다 틀렸구나.』 『왜,오빠 때문이에요?』 『그럼 누구 때문이겠냐.말이 좋아서 자식 농사지어 나라에 바친다고들 하지,그게어디 부모가 견딜 일이라더냐.세상에 어느 에미가 이런 꼴을 보자 하겠니.헌헌장부 다 길러놓은 자식인데…허이구.억장이 무너져서 이거야 호랑이한테 개 빌려 준 꼴이지,뭐가 다를게 있니.』『엄마 마음이야 누가 몰라요,그렇지만 오빠도 다 생각이 있어서하는 일일텐데 너무 그렇게 속 끓이지 말아요.아버진 아주 대범하게 생각하시던데요 뭐.』 『느이 아버지가 사람이니.사람이면 제 자식일에 그럴수가 있는 거라든.』 목이 메이면서 송씨는 치마를 걷어올려 코를 풀었다.숱도 많지 않은데다가 흰 머리칼 가득한 송씨의 쪽진 머리를 내려다보며 은례는 입술을 깨문다.
『염병에 까마귀 소리 듣기지,가만히 있어도 목숨 부지하기가 두근반 세근반인데,아니 안 할 말로 왜놈하고 싸우러 나섰다니 그게 화약을 짊어지고 불로 뛰어드는 거나 뭐가 다를게 있니.하늘보고 주먹질 한다는게 바로 느이 오래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어쩌자고 그렇게 미련하냐 말이다.자고로 하늘이 만든 화는 피할 수가 있어도 제가 만든 화는 못 면한다고 했어.어째 그렇게 미련하냐구.』 코를 훌쩍거려 가면서 송씨는 눈밑을 닦아냈다.
『그렇지만 어쩌겠우.남자가 큰일 하러 나섰다 생각하고 별일 없기나 빌어야지.이미 시위 떠난 화살인가 본데요.』 『왜 하필제녀석이냐 그말이다.어디 세상에 누구는 저만큼 못 나서,난 쑥이네 하며 대가리 직수굿하고 엎어져서들 산다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너 말잘했다.그래,훈장집 딸이라는게 너는 투서(投鼠)나 기기(忌器)라 하는 말도 못 들었니.』 『항아리 깨질까봐 쥐 못 잡는다는얘기요?』 『그래 이것아.세상에 쥐잡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다든.그렇지만 사람이라는게 그릇 깨지는게 무서워서 참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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