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손톱으로 북 긁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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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성복(1952~ ) '손톱으로 북 긁으면' 전문

아침에 깨꽃 붉은 꽃잎이 떨어질 힘도
없이 알루미늄 새시 틈에 말라붙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헤집고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진눈깨비 올 거라는 예보를 무시하고
푸슬푸슬 비 내리고 한길엔 중풍 들린 사내
더디게 게걸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정육점에서
소 뼈다귀 사서 허리 다쳐 몸져 누운 어머니
찾아가는 길, 손톱으로 북 긁으면 슬레이트
낮은 지붕 위로 깨꽃 붉은 꽃잎이 묻어났다



공사장 빈터에서 인부들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다. 몇 장의 번개탄 위에 슬레이트 조각을 얹어 놓은 뒤 삼겹살을 펼치면 건조한 슬레이트의 표피들이 삼겹살의 기름을 흡수한다. 노릿노릿하고 맛있는 삼겹살. 먹는 동안 세상 근심 없어지는 삼겹살. 시인은 그 건조한 슬레이트의 낮은 지붕조차 손톱으로 북 긁고 싶어한다. 거기 피어나는 한줌의 혈흔. 깨꽃 붉은 잎새마다 피어오르는 그리운 혈육의 정!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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