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경제대국 경차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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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본에서도 요즘 휘발유 값 급등이 화제다. 휘발유 값 인상은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도 상당한 부담을 주는 모양이다.

일본의 휘발유 값은 2000년 초 L당 90엔(현재 환율로 약 720원) 안팎에 그쳤다. 하지만 국제유가가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오름세를 거듭해 이번 주 들어 전국 평균 145.4엔(약 1180원)까지 뛰어올랐다. 일본석유정보센터는 16일 "1987년 가격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사이 50% 넘게 상승한 것이다.

휘발유 값 때문에 차량 운전자가 힘들어 하는 것이 일본만의 사정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대응은 확연히 달라 보인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는 게 기본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놀라운 것은 일본 전역을 휩쓰는 '자동차 줄여 타기' 바람이다. 경차 판매가 3년 연속 크게 늘어나 지난해엔 연간 판매 대수가 200만 대를 넘어섰다. 연 판매치로는 최고 기록이다. 6월 말 현재 경차는 2505만8454대로 전체 승용 자동차의 32.6%를 차지했다(일본 경차검사협회). 자동차 석 대에 한 대꼴로 경차란 얘기다. 일본에선 경차의 기준이 660cc다. 한국 기준(800cc)을 적용한다면 경차의 비율은 더 커진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일 정부가 경차 타기를 조직적으로 장려한 적도 없다는 점이다. 휘발유 값이 오르자 차량 구입비와 유지비가 싼 경차를 이용해야 한다는 일본인의 '경제적 DNA'가 발동됐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소비자의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경차검사협회 관계자는 "휘발유 값이 계속 오르면 중대형차에서 경차로 바꾸는 소비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소비자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도요타.혼다 같은 세계적 자동차 업체들도 환경보호와 경제성을 내세우며 경차 개발에 승부를 걸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는 고급차를 수출해 재미를 보면서 자국에서는 대당 200만 엔 미만의 저렴한 차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내년 1월 1일부터 경차 기준을 1000cc로 상향 조정키로 했다. 경차 비율이 너무 낮아(5.9%) 구입을 장려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치솟는 기름값만 탓하지 말고 소비자가 지혜를 발휘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