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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간다>80.노르웨이 오슬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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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노르웨이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노르웨이란「북으로가는 길목」이란 뜻이죠.오슬로市는 그 길목에 있는 최대의 도시입니다.이제 시내로 들어가면서 오슬로시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오슬로의 포르네부공항으로 마중나온 교포안내원 이씨는 이렇게말문을 열고 앞장섰다.
오슬로시의 인구는 50만명정도이나 크기는 세계에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큰 도시라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녹색을 마음껏 자랑하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문득문득 나타나는 오슬로 피오르드 바닷물의 푸른색은 한낮의 태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는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뷔그데위라는 박물관지역으로 안내했다.먼저 찾은 곳은 바이킹 배 박물관이었다.우리에게 해적으로 알려진 바이킹은 노르웨이의 역사에선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왕조사의 시작이 바이킹으로부터 이뤄졌으니 까.
바이킹의 근거지는 지금의 스칸디나비아지역인 노르웨이.스웨덴.
덴마크,그리고 아이슬란드였다.배를 타고 멀리 나가게 된 것은 비옥한 땅과 새로운 물품들을 찾기 위해서였다.그때가 8세기.닻을 내린 곳에 식민지를 세우고 그 곳을 중심으로 세금도 걷고 무역도 해 富를 늘려갔다.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데가 없을 만큼 바이킹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갔고 결국 1066년 노르웨이의 하랄왕이 영국에서 전사함으로써 바이킹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바이킹 배박물관에 전시된 배는 바이킹 시대 초기에 여왕이 실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왕이 죽자 시신과 함께 생전에 사용하던물건들과 함께 묻혔던 것이었다.
1904년 노르웨이 남부 오세베르라는 곳에서 발굴되어 상당기간 손질을 받았다.1천1백년 이상 땅속에 있었던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말끔했고 또 세련된 것이었다.전체가 목재로 된 길이 21.6m의 배는 앞부분은 공작의 목처 럼 길게 수직으로 뻗어올랐고 뒤끝은 여자고무신의 코처럼 날렵했다.
뷔그데위에는 콘티키박물관.프람호박물관등 배에 관한 박물관이 또 있었다.콘티키박물관이란 콘티키란 이름의 배를 타고 1947년 페루에서 태평양의 폴리네시아까지 8천㎞를 1백1일동안 항해했던 노르웨이 청년 토르 헤이위르달의 모험과 여행 에 관한 모든 것들을 모아놓은 꿈의 박물관이었다.여행과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야만 할 그런 곳이었다.
그 맞은편 바다에 면한 곳에 서 있는 것이 프람호박물관이다.
난센의 북극항해와 아문센의 남극항해때 사용된 길이 39m,무게8백t의 항아리 모양의 배 프람호가 전시되어 있었다.프람이란 노르웨이말로「전진」이란 뜻이니 노르웨이사람들은 바이 킹의 후예답게 배와 항해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가졌던 모양이다.
오슬로 시내로 접어들었다.화사함과 안온함이 느껴졌다.두개의 진한 밤색 건물로 이루어진 웅장한 시청청사가 눈길을 끌었다.1950년 시창립 9백주년을 기념해 건축한 것이라는데 피오르드를제압하듯 내려다 보고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시 청의 눈흘김에도 아랑곳없이 피오르드에는 색색의 보트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 중심가는 카를 요한 거리입니다.대성당에서 왕궁까지 이어지는 1.5㎞의 직선거리는 보행자의 천국으로 국회의사당.국립극장,그리고 각종 상점.레스토랑이 길 양쪽을 에워싸고 있죠.』 카를 요한 거리 입구에 서자 안내원 이씨는 설명을 이어갔다. 『매년 5월17일이면 이 거리는 민속의상에 국기를 들고 나온 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축제가 벌어집니다.1814년의 헌법제정을 축하하는 행렬입니다.』 안내를 받아 카를 요한 거리산책에 나섰다.대낮인데도 자동차는 안전을 위해 라이트를 켜고 달렸지만 속력을 내지 않았고 클랙슨도 울리지 않았다.유리문을 통해본 상점의 진열대에는 노르웨이 특유의 디자인과 색상으로 짠털스웨터가 걸려 있었다.거리가 끝나는 왕궁광장에는 카를 요한왕의 기마동상이 버티고 있었고 왕의 집무처인 왕궁엔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왕궁 구경을 끝낸 우리는 머리를 식힐겸 프롱네르공원을 찾았다.공원이라면 으레 잘 손질된 잔디와 꽃.수목 정도를 연상하게 될 것이나 프롱네르는 여기에 한가지가 추가되었다.조각품이었다.
그것도 무려 6백30개나 됐다.모두가 구스타프 비 겔란이라는 한 사람의 작품이었다.
보리수 가로수길에서 이어지는 돌다리 양쪽 난간위엔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새긴 조각,인간의 일생을 표현한 분수조각,몇개의계단과 계단 곳곳에 세워진 삶의 표정을 그린 조각들,그리고 계단 위 제일 높은 곳에 17m높이의 원기둥형 화강 암조각 모노리트(하나의 돌이란 뜻),모두가 인간의 삶의 진수를 응축시킨 것이라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드넓은 잔디밭에선 젊은이들이 마침 맨손체조를 즐기고 있었다.예술과 인간의 만남이 프롱네르공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오슬로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홀멘콜렌 스키 점프대.『국왕 올라프5세가 즐겨 찾았던 곳으로 가까운 곳에 국왕이 개를 데리고 스키를 즐기는 조각이 있습니다.이곳은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사용되고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활용됩니다.』 안내원 이씨는 국왕의 조각과 점프대 옆에 설치된스키박물관으로 데리고 갔다.스키는 노르웨이의 國技다.『1994년 겨울올림픽이 오슬로에서 차로 4시간거리에 있는 릴레함메르에서 열립니다.그때 꼭 노르웨이를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씨는 아쉬운듯 작별인사를 했다.홀멘콜렌에서 내려왔다.산기슭의 집들은모두가 다른 모양,다른 색깔이었다.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노르웨이사람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의 도전을 꿈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행가.한국경영자協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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