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쌀 재협상 태풍 눈앞에 정치에 휘둘려선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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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004년은 우리 농업에 시장개방이 본격화하는 해가 될 전망이다. 한.칠레 FTA비준과 함께 한.일 간 FTA도 급물살을 탈 것이며, 부진하던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도 올해 중반 이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우리 농업의 핵심인 쌀 시장의 추가 개방이 올해 쌀 협상을 통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쌀은 농업생산과 부가가치, 그리고 고용이나 농가소득의 모든 면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정부.언론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치바람에 휩쓸려 곧 닥칠 쌀 협상의 태풍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1993년 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농업협상에서 2004년까지 10년간 쌀의 관세화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대신 매년 일정한 양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2004년 이후의 관세화 유예 여부에 관해서는 2004년 중 협상하기로 약속했다.

쌀 협상은 또 올해 시작해 올해 끝내야 한다는 시간제약이 있다. 협상의사를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한 이후에도 협상 상대국이 확정되기까지 일정 기간이 소요되고, WTO 차원의 검증절차에도 시간이 걸린다. 쌀 협상은 쌀 수출국과 지루한 줄다리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쌀 협상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우선 협상의 물리적 기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안전한 협상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협상 의사를 WTO에 통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급하게 타협하느라 협상 결과의 면밀한 사전 검토 없는 졸속협상은 절대 금물이다.

실제 협상은 국내 정치와 관계없이 순수히 협상전략 측면에서 결정돼야 한다. 효과적인 협상카드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과도한 시장개방 카드도 문제지만 정치적 압력에 떼밀려 실현 가능성이 작은 시장개방 카드를 준비해 농민에게 과도한 기대감을 주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국내적으로 쌀 협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관세화 대 관세화 유예의 이분법적 사고보다 우리의 쌀 시장 추가개방 폭을 최소화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쌀 재협상 일정은 이미 10년 전에 확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관세화라는 말조차 귀에 낯설다는 농민들의 반응에서 그동안 정부의 쌀 협상에 대한 설명과 홍보의 허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쌀 협상에 대한 정부의 대책 수립이 자칫 국내 정치 바람에 밀려 기회를 놓치거나 표류되지 않아야 한다.

서진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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