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기획원은 부총리 산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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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정재석­이경식­최각규씨 당시 국·과장들/「5,6공 인물배제」 원칙으로 선택폭 좁아
지금으로부터 꼭 30년전의 경제기획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흥미있는 면면들을 되짚어 낼 수가 있다.
63년 당시 경제기획원의 종합기획국장은 바로 정재석 신임 부총리였다.
이번에 자리를 물려준 이경식 전임 부총리는 당시 정 국장 밑의 재정금융과장이었고,전 전임자인 최각규부총리는 투자예산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문민정부 출범전이었던 지난 91년 2·18 개각이후 「최각규­이경식­정재석」으로 이어져온 부총리 발탁은 결국 60년대초부터 갓 서른 또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두각을 나타내며 개발경제의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들을 역순으로 기용한 셈이 됐다.
60년대초 이른바 개발연대가 시작되면서 자유당 때의 부흥부는 경제기획원으로 강화·개편되고,이때 정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조직과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데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각 분야의 인적자원이 별로 두텁게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에는 경제기획원이 「인재의 집합소」여서 정재석·최각규·이경식 3인의 「젊은관료」 외에도 뒷날 장관급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3공때 2대 동자부장관을 지낸 양윤세씨가 당시 1차산업과장이었고,78년 농수산부장관을 거쳐 90년 다시 동자부장관으로 재입각했던 이희일씨는 당시 이미 종합기획과장을 지내고 경제조사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공공차관 과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황병태 현 주중국 대사도 빼놓을 수 없으며 사무관으로는 김채겸의원(민자·울산,전 쌍용양행 회장)이 있었다.
또 이번에 건설부장관에서 물러난 고병우 전 증권거래소 이사장은 당시 경제과학 심의위원회에서 상공담당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다.
70년대 중반이후 이들은 거의 한두번씩은 관을 떠나 기업이나 대학에 몸을 의탁해야 했던 「변신」의 경험을 갖고 있다.
신임 정 부총리만해도 72년부터 건설부차관을 지내다 자시 관직을 그만 두었었고,이후 79년 「개발연대의 종언」을 알리는 안정화 시책이 처음 구상될 무렵 당시 신현확부총리가 기획원차관으로 다시 불러들이면서 호흡을 잘맞춰 곧 이어 상공부장관에 오르는 기반이 됐다.
정 부총리는 64년부터 교통부·철도청에서도 근무하는 등 비교적 여러 부처를 거쳤는데,철도청차장 시절에는 김영삼대통령의 사돈인 김웅세 전 롯데월드 사장(당시 철도청 기획관)과 상하관계를 맺은 인연이 있다.
이처럼 30년전의 기획원 인맥과 진용을 새삼 되짚어보아야 할 만큼 최근의 부총리 인사는 「복고풍」 일색이다.
이들은 과거의 경력에서 보듯 일찍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국가경영의 상당한 부분까지를 맡아 해보았던 관록이 있고 관계·학계·업계·정계 등에서 두루 일해본 경륜도 갖추고 있다.
보다 균형된 감각속에서 실물쪽에 바탕을 두고 경제정책을 이끌어 갈 수 있으리란 기대다.
그러나 「5,6공 인사배제」라는 원칙속에 「3공인사」들의 관록과 경륜을 중시하면서 「복고풍의 새바람」을 계속 불어넣으려는 것은 이제 각계의 인적자원이 어느 정도 두터워진 상태에서 인위적인 「인물난」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반성도 일부 일고 있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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