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다나카 前일본총리-개성 돋보인 日 금권정치의 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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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개성과 특유의 결단력으로 日本정계의 최정상에 군림했던「金權정치의 대부」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前총리가 16일 東京 게이오(慶應)大부속병원에서 숨졌다.
75세.
그는 과감한 추진력.자금력을 바탕으로 자민당 간사장.정조회장.대장상.통산상등을 역임한 뒤 72년7월 총리가 됐다.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와 자민당총재직을 놓고 소위「角福전쟁」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싸움끝에 제16대 자민당총재직에 오 르면서 제64대총리에 취임한 것이다.
그는 72년 9월 취임2개월만에 中國을 방문,美國에 앞서 국교정상화를 단행하는 과단성을 보였다.「컴퓨터가 달린 불도저」란별명은 과감한 그의 정치스타일을 두고한 말이다.
73년 10월 蘇聯을 방문,제2차대전후 미해결인 채 남아 있던 문제를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 쿠릴열도 4개섬에 대한 영토문제가 일본과 소련간에 존재함을 시인케 한 사람도 다나카다.
역대 총리가 대부분 東京大출신이었으나 그는 고등학교 졸업이란학력으로 총리가 돼 정권발족 초기 서민재상으로 국민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72년 12월 총선에서 의외로 고전한뒤 소선거제 도입시도도 좌절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그가 제창한 일본열도개조론에 자극받은 토지투기가 인플레를야기한데다 73년 10월 석유위기에 의한 광란물가로 내각지지율이 급락한 상황 에서「다나카 金脈」이란 제목으로 정치자금스캔들이 文藝春秋에 보도되면서 74년 10월 퇴진했다.그는 76년 7월 美 록히드사로부터 비행기 도입을 둘러싸고 5억엔을 받은 혐의로 체포돼 83년 징역4년,추징금 5억엔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東京=李錫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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