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93년>2.김정일 호칭 통해본 위상승격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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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내년 후계자 결정 20년을 맞는 북한의 金正日은 공식호칭이 무척 많다.73년 9월 노동당 조직.선전선동 담당비서로 선출되면서「黨중앙」이라 불린 이후 최근의「아버지」「수령」에 이르기까지 30여가지에 이르는 金正日의 호칭은 북한권력구 조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말해줘 호칭의 변화는 곧 그의 권력승계 역사인 셈이다.따라서 金日成만 지칭했던「아버지」「수령」이 金正日에게도 불려지는 최근의 양상은 권력승계가 마무리단계에 왔다는 사실을 짐작케해준다.
金正日의 권력기반 정지작업이 한창이었던 70년대의 대표적 호칭은「黨중앙」.73년 9월 당중앙위 제5기 7차 전원회의 직후처음 사용된후 80년대까지 신문과 방송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 호칭은 金正日이 노동당의 양대 기둥인 조직및 선전선동 비서국을 장악한데서 나왔다.
75년에는 그의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유일한 지도자」라는 호칭이 등장했고 77년부터는「黨중앙」과 함께「영명하신 지도자」「존경하는 지도자」「경애하는 지도자」등도 사용됐으나 金正日은 전면에 나서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한은 이기간중『당중앙의 불빛을 우러러』등의 체제가요 보급을통해 주민들에게「黨중앙」호칭에 익숙하도록 유도했다.
金正日의 호칭은 80년들어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80년 10월의 제6차 당대회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과 당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면서「黨중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호칭이 사용됐다.
83년 2월 그의 제41회 생일을 계기로「黨중앙」대신「친애하는 지도자동지」가 자리잡았고,그해 5월에는「최고사령관」이 추가됐다. 金正日이 軍최고사령관에 취임한 것은 91년12월인데도 그때부터「최고사령관」이 사용된 것은 군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85년 2월에는 金正日이 주체사상의 기틀을 세웠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른바 수령론에 근거한「수령」이 처음 사용됐으나당시엔 보편적 호칭은 아니었다.
86년 2월에는「인민의 어버이」가 등장했고,87년 2월에는 항일혁명 투쟁당시 빨찌산들이 나무의 껍질을 벗겨 새겼다는 이른바「구호나무」발굴사업이 본격되면서「위대한 지도자」「위대한 영도자」등도 쓰였다.
구호나무에는 그를 지칭해『백두산에 광명성이 떴다.광명성을 미래로 우리민족 존엄 떨치자』등의 글이 쓰여있다고 북한은 선전한다. 80년대엔 이같은 여러 호칭이 혼재되는 양상을 보였지만「친애하는 지도자동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다.북한 주민들은 지금도金正日을 비꼬는 말로「친지동」이라 쓰기 일쑤라고 귀순자들은 전한다. 90년대는 金日成에 버금가는 호칭이 등장함으로써 金正日의 권력승계가 임박했음을 예고해왔다.
90년 12월 노동신문은 金正日을「인민의 운명을 책임진 혁명의 지도자」라 불렀고 이후 91년 7월의 인민경제대학 창립 45주년 기념보고에서는 金日成과 같은「위대한 수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위대한 수령」이 사용된뒤 5개월만인 그해 12월 그는 군최고사령관에 임명돼 6백64명의 장성에 대한 승진인사를단행했다.지난해 2월17일 金正日의 50회 생일때는 崔龍海 社勞靑위원장이「친애하는 아버지」를 사용,金正日시대의 도래를 강조했다. 이를 반증하듯 북한은 최근『우리 아버진 김정일원수님』『우리 아버지』등 金正日을 아버지로 묘사한 2곡의 가요을 보급해왔다. 〈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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