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청와대에만 안테나 맞춘 許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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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네바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은 우루과이라운드(UR)최종협상이 진행되는동안 계속 뉴스의 초점이 됐다.
이 지역의 최고급 호텔인지라 美國의 미키 캔터 무역대표부 대표를 비롯해 日本의 하타 외상도 여기에 투숙했었다.
그러나 UR협상기간에 이 호텔에 가장 오래 투숙한 고객은 역시 許信行 농림수산부장관을 단장으로 한 한국의 UR협상대표단이었다.대표단이 여기에 묵은 까닭에 취재진도 이 호텔로 몰렸다.
한때는 로비가 온통 한국사람들로 어지러웠을 정도였 다.
한 日本기자는 의아해하며 물어왔다.
『韓國의 대표단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무더기로 와서 장기체재하는 것인가.듣자하니 주요 부처 차관보들까지 몽땅 여기에 와 있다는데 서울을 그처럼 비워도 괜찮은가.』 韓國으로서는 쌀 문제가 워낙 중요한 문제이므로 총력전을 펴고 있는 것이라고 그에게 설명해줬다.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기자가 옆에서 보기에도 딱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협상대표단 단장인 許장관부터 안타까운 노릇이었다.지난 7일 캔터대표와의 회담을 끝으로 장관이 협상 현장에 직접 나서서 할 일은 없었다.
장관의 장기체류로 오히려 실무자들만 더 피곤해할 뿐이었다.장관이 차관보가 해야 할 일을 챙기니 차관보는 실무 과장이 하던일을 챙겨야 했고,공연히 협상 상대의 급수만 높이는 바람에 아무 실속도 없는 회의로 인력.시간낭비를 초래한 일도 없지 않았다.똑 같은 회의를 재차 요구하다가 창피만 당했다.
처음에는 말조심을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대표단 안에서도 조심스럽게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젊은 관료들 사이에서는『문민시대라고 해서 달라진게 뭐냐.오히려 군인시대보다 더 군대식의난센스가 통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미 국과의 협상보다는 서울을 향한 충성경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관들을두고 하는 말이었다 결국 제네바 최고급 호텔에서 최장기 투숙을해오는 동안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은 협상 상대인 미국의 意中을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의 높은 뜻을 간파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협상 결과를 놓고 기자회견을 한 許장관의 태도는 이러한분위기의 클라이막스였다.그는 당당하게 쌀 협상의 성공을 내세웠다.金대통령의 정치력에 힘 입은바 컸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고,자신의 협상술이 주효했음을 자랑했다.
그러나 쌀을 대가로 미국측에 대폭 양보한 쇠고기를 비롯한 기타 농산물 부분은 설명자료에서조차 쏙 빼버렸다.거듭되는 질문에그 부분은 나중에 실무자에게 물어보라고 미뤘다.
미국에 곤욕을 치렀던 부분에 대해서는 끝내 어물쩍 넘어갔다.
정직성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農政의 주무장관으로서 그는 단 한마디도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밝히지 않았다.무엇이 許장관의 눈을 흐리게 했을까.혹시 제네바의 협상 현장속에 너무 오래 파묻혀있었던 것이 長官 본연의 역할을 깜박 잊게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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