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훈령조작」 결론/발표 앞서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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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상연·엄삼탁씨 주요대목서 “보고 못받았다”/정 전 총리는 기억 잘 못해 당시상황 파악 애로/청훈지연 이유는 안기부 실무진 “태만”으로 밝혀져
감사원이 고민하고 있다. 남북 고위급회담의 대통령훈령 조작의혹사건 전말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청훈이나 훈령 등 전문의 해석이 힘들어서도 아니다. 사건의 열쇠를 쥔 안기부 실무진 사이에 말들이 조금씩 엇갈리고 있고 안기부의 이상연 전 부장과 엄삼탁 전 기조실장 등 고위인사들은 주요 대목에서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한발 물러서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식 전 총리는 대부분 『기업이 잘 안난다』거나 감사원에서 서류를 보여주면 『그게 이거였구나』하는 등 실무에 어두운 면을 시종일관 노출하고 있다. 또 확인된 사안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옮고 그름의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없다. 남북대화업무가 워낙 미묘하고 방대해 한 두 사안만으로 당시 행위의 정당성을 유추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감사원은 이번 사건의 핵심중 하나인 소위 괴문서의 정체를 밝혀냈다. 당시 평양에 파견된 이동복 전 안기부장특보와 엄익준 상황실장 등이 정부의 공식훈령이 아닌 소위 「괴문서」(기존지침을 고수하라)를 만들어 이를 회담 대표들에게 허위로 보고한 것이다.
소위 예비전문 성격의 이 문서는 서울에서 보낸 사실이 없는,안기부 평양상황실에서 만든 것. 안기부측은 『회담상황의 변동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대응책을 예비전문에 담아두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감사원은 『이 예비전문은 정부의 공식훈령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를 정부의 공식훈령인양 대표단에 보고했다면 훈령을 조작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이 전 특보는 왜 이같은 가짜훈령을 진짜처럼 대표단에 보고했을까.
감사원은 이 전 특보와 임동원 전 통일원차관의 공명심 경쟁에서 해답을 찾는 듯하다. 남북회담 20여년 경력의 베테랑인 이 전 특보는 임 전 차관이 청훈한 「회담상황변경」의 내용을 파악,이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북한의 꾐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하에 「기존지침고수」의 「괴전문」을 끌어내기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감사원은 또 청훈지연 이유에 대해서도 안기부 실무진의 「태만」을 밝혀낸 것으로 보인다. 실무진은 당시 임 전 차관 등의 청훈을 10시간 가까이나 지연해 보고한데 대해 『엄 실장을 찾느라고 그랬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엄씨는 집에 있었으며 설령 없었다하더라도 이 부장에 직보할 수도 있었다는 것.
감사원은 또 정 전 총리의 행위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정 전 총리는 대표라는 직분상 회담 실무를 세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워도 여러번의 전문이 오가고 회담 대표들간의 입장차이가 확연한데도 「교통정리」를 취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 전 총리가 청훈내용을 파악,정리해서 청훈을 했거나 대표단 토론회라도 거쳤으면 이같은 훈령사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후판단이다.
한편 감사원은 일부 간부들과 실무진들의 진술이 조금씩 엇갈리고 있는 부분에 대한 보강조사를 마치는대로 진상을 발표할 예정이다.<신동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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