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거울과 나침반] '불감증'시청자들에 문화의 생수 건넬 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TV에 실망하고 결별을 선언한 사람들의 불만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들은 TV가 너무 정치적이거나 너무 세속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똑같군. 똑같아." 그들은 TV를 시청하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정신건강에 해롭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TV는 바보이거나 문제아일 것이다. 그러나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화장을 지운 TV의 순박한 얼굴을 발견하는 기쁨도 간혹 누릴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사흘(12월29~31일) 연속 방송된 한국문화전문채널 KBS KOREA의 '송년특집 2003 문화예술'은 TV도 잘만 활용하면 상당히 이로운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위성방송의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 지상파방송에선 엄두도 내지 못할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편성했다. 사흘 내내 음악.무용.국악.미술.영화.문학출판.만화 등 문화 전반의 이슈를 상세하게 정리해 주었다.

통 크게도 총 24시간 분량을 제작했고 그것을 3번 연거푸 방송했다. 사흘 동안 어느 시간이라도 그 채널을 맞추면 그윽한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셈이다. 같은 시간 다른 채널에선 각종 연예시상식 중계에 바빴고 여기저기 상 받으러 다니느라 택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 인기연예인도 있었다.

새해부터는 TV의 대중문화 편중을 좀 누그러뜨리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어떻게 봅니까'라고 묻고 싶다면 '나는 왜 저런 것을 재미없다고 느낄까'하고 다시 되물어 볼 일이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중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건강이다. 인공호수가 눈길을 끌지 몰라도 사람들은 마침내 강과 바다의 가치를 인정한다. 클래식 문화와의 만남이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더없이 좋다는 걸 대중에게 깨우쳐줄 필요가 있다.

KBS KOREA의 현정주 책임PD는 "예술에 빠지면 안 된다. 예술과 방송의 경계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경계인은 기회를 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회를 넓혀줄 때 빛이 난다. 문화전문채널의 PD들은 스스로를 환자라고 말한다. 자조적인 표현인 것 같지만 그들의 표정 위엔 자긍심이 가득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에 가깝다. 자극적인 오락에 길들여져 본격적 문화와의 접촉에는 불감증환자가 되어 버린 대부분의 시청자들을 무서운 중독에서 구해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시청률의 노예'라는 말이 있다. 그뿐 아니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면 온갖 종류의 노예들로 넘치고 있다. 물질의 노예, 쾌락의 노예…. 노예가 해방되려면 우선 노예들이 각성해야 한다. '나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보다 '솔직히 나는 노예다'라고 인정한 뒤에 그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노예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게 순서다. 문화예술전문 PD들은 이 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될 일이 아니라 호젓한 산에서 내려와 황량한 문화사막에서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의 생수를 공급할 궁리를 해야 한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