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풀린 공직사회 “경고”/교통·항만청장 경질과 긴급각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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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리 안정보다 책임행정 선택/국민에 “심기일전” 다짐 의미도
서해페리호 참사가 터진지 8일만에 김영삼대통령은 내각의 나사를 조이고 민심을 추스르는 조치를 취했다. 선체에서 시신이 68구나 더 쏟아져 또 한차례 충격의 파도가 국민의 가슴을 때린 직후였다.
비록 교체된 사람은 장관 1명,청장 1명에 불과하지만 이번 내각손질은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인사는 우선 김영삼정부에서 이루어진 사실상 첫번째의 장관교체라는 점이다. 신정부 출범직후인 지난 3월초 재산·자녀문제 등으로 법무·보사장관,서울시장이 물러나긴 했다. 그러나 성격상 그것은 부분적인 부실출범에 따른 후속조치의 성격이었을 뿐이다.
김 대통령은 장관을 자주 바꾸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김 대통령은 내각의 잦은 교체가 6공의 부실성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김 대통령은 장관은 한번 시킨면 최소한 1년6개월∼2년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파면
그런 김 대통령이 8개월만에 교통장관을 해임했다. 형식상 해임이었지 실제로는 파면이나 다름없다는게 청와대측 시각이다. 이는 아무리 내각안정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책임행정을 앞설 수는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가 터지자 김 대통령은 구포·아시아나 때보다 더욱 강도높게 정부의 책임을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교통장관을 교체해 전 내각을 문책하고 공무원사회에 날카로운 경각심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예상대로 김 대통령은 18일 오후엔 신정부 출범후 처음으로 장·차관,청장 등 70여명을 청와대로 불러 임시국무회의를 열었다. 공무원들에겐 복무자세를 다시 가다듬도록 경고하면서 국민에겐 『정부가 심기일전하겠다』고 다짐하는 행사다.
김 대통령은 당초 상당한 폭의 개각까지도 검토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핵심측근들 주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장관경질로 한정된 것은 사고문책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다른 면으로는 이번 인사를 강한 문책성격으로 부각하기 위해 본격적인 내각 수술이 잠시 유보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연말 당정개편
청와대나 민자당주변의 관측통들은 빠르면 연말에 대규모의 당정개편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개편이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역동성 부족,청와대와의 교감부실,일부 무능장관 등 현 황인성내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대폭 수술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김 대통령은 장관교체와 임시국무회의로 국면전환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대국민사과와 공직사회의 심기일전이라는 수순은 과거에도 큰 사고가 났을 때마다 늘 해오던 것이어서 이런 조치가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우선 정부,나아가 공직사회의 일선이 과연 정신을 차리고 움직일까 하는 문제다. 김 대통령은 사고소식을 접하고 『내가 그렇게 여러번 지시했는데…』라며 탄식한 바 있다. 마이동풍처럼 둔감한 일선 공무원들이 팔을 걷어붙일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충격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국면전환 시도
정부에는 아직도 신정부의 개혁풍이 제대로 먹혀드는 것 같지 않다. 「주먹구구식」 때문에 서해페리호가 가라앉았는데도 사고 다음날 정부의 중앙사고대책협의회는 「대충 때려 잡아」 승선인원을 2백명 정도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천t을 올릴 수 있다는 설악호는 수백t도 견뎌내지 못하고 쇠줄이 끊어졌다. 문책인사와 공직기강 확립의 다짐만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할 사안인 것 같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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