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증후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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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86년초 일본 국사교과서가 일제 침략부분에서 너무 왜곡되었다는 지적이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당시 일본 문부장관이었던 후지오라는 사람은 『불만을 말하는 놈들은 세계사중에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가』라고 버럭 화를 내며 한일 합방은 양국의 합의하에 성립되었으니 한국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한마디가 일파만파의 민족적 분노를 일어켰고 일본 정부도 마침내 후지오문부장관을 사임시켰다. 이 무렵 일본의 한 유명 잡지사에서 한일 양국 학자를 초빙,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서도 일본인 학자들이 후지오장관의 발언을 옹호하는 자세를 보이자 격분한 한국인 교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퇴장해 버렸다. 일본 잡지는 한국인 교수의 퇴장까지 소개하며 선전을 해댔다.
유사한 형태의 일본인 망언은 53년의 구보타 망언에서부터 시작되어 엊그제 있었던 가세 히데아키라는 평론가의 망언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이들 망언의 주조는 일본의 조선통치는 합법적이었고 그 결과는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다른 열강에 의해 어차피 지배당할 운명에 있었다는 숙명론을 펴기도 한다.
광복이후 반세기에 걸친 일본인의 망언에 대한 우리네 대응방식도 한결같다. 잊을만하면 불쑥 튀어나오는 일본인의 망언에 화를 내다간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시기으로 잊어버리고 사는게 우리네 망언 대응방식이다. 마치 일본인들은 우리의 이런 망각 습관을 테스트라도 하듯 정기적으로 망언을 일삼고 있다.
우리가 적반하장격 일본인들의 이런 망언에 대해 보이는 망언 증후군이 일본인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한번쯤 생각해볼 때가 많다. 말 같지 않은 망언에 대해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의연한 자세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잘못된 말이니 이를 바로 잡는 논리 전개나 토론도 없이 버럭 고함 한마디 지르고 마는 우리식 망언 증후군이 일본인들의 망언을 유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또 이들의 망언이 사실은 단순한 망언이 아니라 일본인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속마음이라면 이에 대한 우리네 대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무턱대고 화만 내는 반일이 아니라 이들의 오만한 자세를 경제적으로,문화적으로,현실적으로,누를 극일의 방식을 우리네 가슴속 깊이 갈고 닦는 의연한 자세가 더욱 긴요한 때다. 그래야만 일본인들 스스로 망언같은 실없는 소리를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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