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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35. 새로운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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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민족사관고는 영재교육 선진국의 성과를 적용하면서 새로운 영재교육 방법을 개발하는 개척자가 돼야 한다는 두 가지 역할을 이뤄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영재교육 전문가가 적어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특히 일선 교사들 가운데 영재교육 분야 전공자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국내에 있는 극소수의 영재교육 전문가들에게 영재 교수법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들의 연구 결과를 민족사관고 교사들을 통해 실제 수업에 적용했다. 이 같은 실험적 수업에서 검증된 연구 결과만 본격적으로 수업에 활용해 교육의 질을 높여 나갔다.

민족사관고 교사는 모두 훌륭했다. 다른 고교 또는 대학에 몸담고 있었거나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 등에서 근무하다 민족사관고 설립 소식을 듣고 지원해 온 사람들이었다. 전국에서 가려 뽑은 영재를 가르쳐야 하는 만큼 교사들은 학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두뇌와 자질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교사들의 머릿속에 이미 들어 있는 '학교'나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이었다. 나름대로 '학교는 이런 곳이어야 하고, 교육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실험적인 학교에 와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교사들은 입만 열면 "전에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이렇게 했는데…"라며 사사건건 비교하려 들었다.

그 때마다 나는 "전에 있던 학교의 모습은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고 주문했다. 또 "이 학교는 여러분이 배웠던 교육 이론서에도 없고, 여러분이 과거에 몸 담았던 학교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곳입니다. 그러니 낡은 사고의 옷은 벗어버리시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교육전문가가 아닌 내가 교육 이론.방법에 대해 지시하는 게 속으로는 미덥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학부모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교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30명의 학생은 모두 장학생이다. '천재'로 불리던 아이들이었다. 이들의 부모가 자식의 미래에 꿈을 싣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많은 학부모의 꿈이 '서울대 진학, 판.검사로 출세' 식으로 정형화돼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식을 서울대 법대나 의대에 보내는 것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 중에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자신은 물론 가문의 신분 상승까지 꿈꾸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 같은 목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참선이니 전통문화 교육이니 하는 것에 시간을 뺏기는 게 아깝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학부모가 많았다. 그들은 교사의 수업 방식과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게 항의하곤 했다. 나의 뚝심이 아니었으면 민족사관고라는 배는 출항하자마자 뒤집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부 승객과 선원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족사관고 출범 첫해, 최대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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