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의병장은 문석봉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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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895년 명성황후 시해후 대덕서 천명 이끌고 봉기/붙잡히자 탈옥… 원주일대서 일군과 맞서 빛나는 전과/유족등 끈질긴 자료추적… 보훈처서 공적인정
을미사변이후 「최초의 의병장」으로 1895년 9월 충남 대덕에서 봉기한 문석봉선생이 공식 인정돼 국사교과서에 기록되게 됐다. 유족들과 사학자들의 끈질긴 자료추적으로 문 선생이 구체적인 의병활동을 한 최초의 의병장임을 확인하고 이를 국가보훈처가 인정해 이번 광복절에 문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제까지 최초의 의병은 단발령이 내려진 1895년 12월31일 다음날인 1896년 1월1일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이천의병(의병장 김하락)으로 기록되어 왔으나 문 선생에 대한 공적확인으로 최초의병 봉기일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9월18일로 3개월이상 앞당겨진 셈이다.
의병은 일본이 1894년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뒤 친일내각을 구성,갑오병장을 실시한뒤 발생한 의병(갑오의병)이 최초이나 본격적인 의병활동은 을미사변이후 봉기한 의병(을미의병)을 꼽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돼있어 문 선생을 최초의 의병장으로 인정하는데는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학계에서는 문 선생에 대한 독립장 추서는 이제야 비로소 한국의병사가 제대로 정립될 기틀이 마련됐다는 의미를 지니며 국사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1851년 12월24일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출생한 문 선생은 고종 32년인 1895년 왜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분격해 9월18일 충남 대덕군 유성에서 「의거토벌」(의롭게 떨쳐일어나 왜인을 토벌한다)을 기치로 분연히 일어섰다.
최초의거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의병이 수개월만에 1천여명으로 불어났을 정도로 선생의 애국심과 영도력은 탁월했다.
문 선생은 우선 회덕관아를 습격,신총 3백정과 대검 등을 빼앗아 의병 등을 무장시키고 선봉장에 김문주,종군장에 오형덕을 임명해 진용을 정비했다.
문 선생은 진잠을 거쳐 공주로 진군하다 10월28일 일본군·관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공주전투에서 패전,첫 시련을 맞았다.
이때부터 문 선생에게는 일만금의 현상금이 내걸리게 된다.
공주 패전이후인 1895년 11월 남은 의병 2백여명을 이끌고 고향인 현풍으로 낙향한 문 선생은 초개현감·현풍현감·고령현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가 고령현감이 일본군에게 문 선생을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돼 대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문 선생 문중에서는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문 장군은 살려야 한다』며 1896년 4월 야밤에 문 선생이 갇혀 있는 대구감영 감옥을 파괴하고 문 선생을 구출해냈다.
문 선생은 탈옥한 뒤 근거지를 원주로 옮겨 다시 1천여명의 의병을 규합,일본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으나 감옥에서 당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재봉기 1개월만인 5월 낙향해 그해 11월19일 45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충남대 김상기교수는 『문 선생의 봉기는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한국 의병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하고 『특히 단발령에 반발해 일어난 이천의병을 최초의병으로 볼 경우 의병활동이 반개화성격만으로 규정되나 문 선생이 최초의병으로 확인됨으로써 의병의 성격이 반침략·반외세로 확대됐다는 의미도 크다』고 말했다.<진세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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