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심사 때마다 얘기해온 점이지만 투고자들이 꼭 유념해야 할 사항으로 시조는 시라는 사실, 그리고 가락이 있는 시라는 사실을 강조해 두고 싶다.
음보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작품들이나 말만 가득할 뿐 시로 볼 수 없는 작품들 앞에서 실망할 때가 적지 않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한 가운데 김문기씨의 「정릉1동의새벽」은 단연 빼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다. 구체적인 이미지, 적당한 풍자, 절제된 언어가 잘 어우러져 우리 시대의 절실한 노래를 만들고 있다. 좀 더 노력하면 우리 시조 시단의 개성으로 자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곽신영씨의 「맞선」은 우리네 옛 여인들의 섬세한 감성이 빚어낸 성공적인 내간체를 읽는 느낌이다. 시조가 서정시라는 견해에서 이러한 고전적 미학을 도의시할 수 없다. 전이중씨의 사설시조 「침엽수를 보며」도 작자의 사설시조에 대한각고의 흔적이 엿보인다. 중장의 엮음이 실은 사설시조의 생명인 셈인데 다소 추상적이어서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 좀더 공정을 들여 성과가 있길 바란다. 입선작 중에서 서희자씨의 「태풍91」은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시는 행간에 더 많은 의미를 숨겨 두어서 독자가 찾아내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 즉 여운이 있어야 한다. 이주식씨의 「이농」역시 긴장감을 적당히 가미한 성공작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보여주는 그림 자체가 너무 구식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이건영씨의 「그믐달」, 나순옥씨의 「그리움」, 김선호씨의 「왕겨」 등도 대체로 시조를 형식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내용과 형식이 구분 없이 조화되어 일체감으로 다가설 때 성공적인 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듯 하다. 모두의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이우걸·박기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