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100일짜리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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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농림부 장관 기자간담회 오후 5시'.

6일 오후 3시에 날아온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다. "나흘 전에 장관 간담회를 했는데 웬 또 간담회?" 의아해 하는 기자들에게 박홍수 장관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이틀 뒤 청와대는 법무부.농림부.정보통신부 등 장관급 인사 7명의 개각을 발표했다. 박 장관이 잘린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는 "오래됐고, 본인이 사의를 표명해서…"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사의를 받아들인 수동적 개각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나흘 뒤 사표를 낼 텐데도 기자간담회에서 의욕적인 정책 의지를 밝힌 박 장관이 이상하게 돼 버렸다.

사실 정권 말 개각이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다. 역대 정권들도 임기 1년여를 남기고 보은 인사를 해 왔다. 그래도 예전에는 최소한의 염치는 있었다.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한다는 명목은 내세웠다. 하지만 이번 개각 대상은 선거와 거리가 먼 부처들이다. 여기에다 남은 임기는 6개월이 안 될 게 뻔하다. 12월 말 대선을 감안하면 실제 임기는 4개월 남짓이 고작이다. 나머지 2개월은 차기 정권인수위원회에 업무를 넘겨주기 바쁘다.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심드렁한 반응이다. "별다른 차이가 있겠나"거나 "새로 업무보고를 하려면 좀 성가시겠다"는 정도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뭔가를 벌이기에는 남은 임기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취임사를 준비하는 직원들도 머리를 싸매고 있다. "거창한 포부를 담을 수도 없고, 그래도 뭔가 건수는 한두 개 넣어야 할 것 같고…"라는 고민이다.

얼마 전 농림부의 한 간부가 뉴질랜드에 다녀와서 전해준 후일담. 그 나라 농정 고위 담당자는 1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농림부 간부가 헤어지면서 박 장관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문했다.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장관 성함이 뭐랬죠? 한국은 장관이 하도 자주 바뀌어서…"라며 오히려 미안해 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처럼 10년은 아니라도 1년 정도는 자리를 지켜야 장관(長官)이라는 직함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임기 4개월짜리라고 함부로 단관(短官)으로 바꿔 부를 수도 없고…. 좋은 말(馬)은 자기가 밟고 온 풀은 뜯어먹지 않고, 좋은 나무꾼은 집 주변 나무를 베지 않는다고 한다. 정권 말에 아무리 주변 인물을 골고루 챙겨 주는 회전문 인사라 해도 이번 개각은 감동도 전혀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박혜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