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역할론(성병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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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의 국무총리제도는 선진 민주국가에는 별로 예가 없는 독특한 제도다. 우리나라와 같은 대통령제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미국같은 나라는 국무총리제도가 아예 없다. 내각이라는 용어는 쓰지만 대통령 외에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내지 내각수반 등의 제도는 두지 않는다. 대신 부통령제도가 있지만 대통령 유고시의 승계자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평상시 행정 각부를 지휘·통할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조심스럽고 힘든자리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국무총리 또는 수상이란 제도가 있으나 이는 우리 총리와는 권한과 기능이 전혀 다르다. 의원내각제 하의 총리는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같은 행정수반으로서의 강대한 권한과 책임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 총리와는 이름만 같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총리를 현 프랑스 제5공화정의 총리와 비슷하게 보는 견해가 있다. 비교적 강력한 대통령하의 총리란 점에서 비슷한 점이 없지 않으나 다른 점 또한 적지 않다. 대통령과 국회의 신임을 모두 필요로 한다는 점은 유사하나 프랑스 총리는 국회의 신임에 더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행정적이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다른 「동거체제」에서는 국회 다수세력을 대표하는 총리의 위상은 대통령을 능가하게 된다. 국제적 정상회의에는 프랑스를 대표해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비중의 공동대표로 참여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총리는 헌법상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게 되어 있다.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는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국무위원의 임명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뜻에 좌우되어온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다. 이렇게 총리의 위상이 모호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총리의 역할을 규정하기도 어렵고,그만큼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더욱 어렵다.
총리의 바람직한 역할은 대통령의 성격 및 국정운영 스타일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대통령의 성격이 강하고 만기를 총람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면 그만큼 총리의 입지는 좁아진다. 반대로 결단력이 부족하고 책임지는데 익숙지 않은 대통령 아래서는 인책사태로 총리는 목을 내놓기가 바쁘다. 그리고 어떤 유형의 대통령도 총리에게 책임을 져주는 것 이상의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정치총리란 평을 들으면 심한 견제를 받거나 결국은 밀려나고 마는게 지난날의 예였다.
○조정·통제능력이 중요
이렇게 국무총리란 자리는 중요하지만 조심스럽고 어려운 자리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교적 장수하면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총리들이 있었다.
역대 총리중 최장수는 정일권총리다. 박정희대통령 초기에 6년반을 재임했다. 그가 장수를 누린 것은 군의 최고원로로서 박 대통령의 군부사회 내에서의 권위확립에 기여한 것과 함께 원만한 성품과 조정능력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낮은 처신이 박 대통령의 정치적 견제심리를 발동시키지 않은게 그의 장수를 가져왔다.
70년대 전반기에 4년반 재임한 김종필총리는 그의 정치적 위치 때문에 비교적 강력한 총리였으나 바로 그 정치성 때문에 심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
5,6공에서 대표적 총리는 각각 노신영·강영훈총리를 들 수 있다. 단명 총리시대에 2년을 넘긴 점도 그렇고,대통령제 하에서 소리없이 행정각부를 행정적으로 비교적 잘 통할하고 조정했다는 평가에서도 그렇다.
문민정부 출범후 지난 4개월간은 김영삼대통령 주도로 개혁·사정드라이브가 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총리와 내각은 별로 눈에 뜨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자연히 찬사도 대통령에게 집중됐고,비판도 대통령에게 직결됐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이 내각의 팀웍과 총리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국정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자면 그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국무총리와 부총리의 조정능력 못지않게 대통령의 배려가 긴요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개별 부처의 의견보다 내각의 조정된 의견을 중시하고,중요 사안에 대해 개별부처에 직접 지시를 줄이고 총리·부총리를 통한 지시를 늘리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행정경험 많으면 유리
어차피 우리나라의 제도와 현실에서 총리의 역할은 행정과 의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정치성을 띠기보다는 조용히 행정 내부의 조정·통제에 중점을 두는게 좋다. 때문에 총리는 가급적이며 행정에 정통한 사람이 적합한 것 같다. 다행히 강 총리는 행정경험을 많이 쌓았다. 대통령의 부족한 면을 메울 수 있는 면이다.
강한 성격의 정치대통령 아래서 소리없이 행정의 통일성과 통합성을 조율해 내는 새로운 총리의 모델이 제시되길 기대한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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