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北 핵개발 과시 뭘 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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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의 민간 방문단이 북한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보고 왔는지 아직 분명치 않다. 단지 북측이 자신들의 핵억지력을 가늠케 하는 정도는 보여주지 않았나 짐작된다. 북한은 방북단에 자신들의 핵개발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6자회담 또는 대미접촉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던 것 같다. 북한의 핵역량이 어떠한지, 평양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방북단의 보고를 토대로 보다 면밀한 분석이 나오겠지만 북한의 새해 움직임이 북핵 문제의 원만한 해결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번 평양의 제스처는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 개발계획이 불거진 이후 충돌을 향해 치달았던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이대로 계속 끌고가기엔 힘겹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자기들 방식대로 핵 대치상황에서 벗어나되 적어도 무력충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협상할 의지를 표명한, 철저한 북한식 협상전략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 그 같은 북측의 의지는 대(對)일본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말 일본 자민당 의원 등과의 베이징(北京) 접촉에서 "일본에 체류 중인 납치피해자들이 북한으로 돌아올 경우 가족들을 일본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핵 대치상황이 대화가 아닌 충돌로 발전하는 것을 관련국 모두가 원치 않고, 또 북한의 새 협상안을 놓고 6자회담 관련국들이 머리를 모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보면 북측이 자신들의 핵역량을 기정사실화한 바탕 위에서 협상에 임하겠다는 의사표시라는 쪽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이제 공은 다시 우리 측으로 넘어왔다. 북한의 움직임을 단순한 협상전술로 치부하며 미국 주장대로 불가역적이고 완전한 해법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북측의 언약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6자회담으로 돌아와 내실있는 협상을 재개할 것인가. 과거에 비춰볼 때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북협상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북압박을 유일한 대안으로 고집하기엔 사태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가 너무 심각하다. 비록 북측의 새해 움직임이 단순한 제스처에 불과할지라도 이를 근거로 삼아 만나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