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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석 칼럼] 한국경제에 깃든 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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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질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대부분의 만성질환이 겉으로 나오기까진 수십년이 걸린다고 한다. 암 같은 것도 1mm짜리 반점이 나타났을 땐 이미 10억개의 세포가 형성된 뒤라는 것이다. 그 전에 몸이 나른하다든지, 기침이 자주 나온다든지, 식욕이 변한다든지 하는 징후는 있어도 무심히 넘기기가 쉽다.

*** 만성질환 초기증세 아닌지

경제에도 안 좋은 징후들이 나타난다. 애써 일하기보다 놀기를 좋아한다든지, 한 것에 비해 더 많이 바란다든지, 새로운 것을 애써 만들기보다 있는 것 나눠먹고 잘 살자는 생각을 많이 하면 경제가 잘 될 수 없다. 사람도 젊을 땐 웬만한 무리를 해도 넘어가지만 나이가 들면 탈나기 쉽다. 경제도 발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만성병이 생기기 쉽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가 넘었다는 것은 벌써 젊지 않은 경제라는 뜻이다. 선진국들은 대부분 전 세대보다 다음 세대가 못 사는 경험을 한번쯤 했다. 우리라고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쇠락하거나 문명이 소멸되는 것은 자연재해나 외침보다 사회갈등 등 스스로의 요인에 의해 자멸한 경우가 더 많다. 그땐 인구, 그중에서도 젊은층이 많이 줄고 일과 모험을 싫어하며 이벤트와 굿판이 성행하고 지도층이 불신받는 등의 일이 겹친다.

지금 한국 경제는 어떤가. 안 좋은 징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밖의 호조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고 실업자가 많아지며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다. 경기란 것은 기복이 있는 것이니까 하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기침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만성질환의 초기 증세가 아닌가 염려되는 점이 있다. 잠재성장률의 저하나 소자고령화(少子高齡化)의 급속한 진전은 심각히 고민할 만하다. 환경과 마음가짐, 생활습관이 안 좋으면 건강할 수 없듯 경제도 사회분위기나 시스템, 자조능력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경제 활력을 좀먹고 장차 치명상이 될 요인들을 줄여가야 한다.

첫째가 경제가 사랑받지도 존경받지도 않는 분위기다. 경제가 잘 크려면 소중히 키워야 하는데 요즘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새 경제논리는 천박한 하위가치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자업자득의 탓도 있지만 시대조류가 그렇다.랭킹 상위 기업부터 줄줄이 잡혀가 추달받는 사태는 안팎으로 어떻게 비칠까. 경제가 일어나기엔 요즘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

둘째, 노련하고 책임있는 집도의(執刀醫)들이 부족하다. 경제란 항상 병이 나게 마련이다. 요즘엔 병도 복잡해지고 합병증도 많아졌다. 초기에 정확히 진단해 손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빨리 증상을 보지도 못할 뿐더러 적절한 치료도 못하고 있다. 뒤에서 책임지고 봐주는 사람도 없으니 스스로 면책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작은 병도 크게 만들고 환자를 개복해 놓고도 토론만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카드사태 처리 과정을 보라. 그런 사고는 앞으로도 날 수 있는 일인데 정말 걱정된다.

셋째,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제 일에 종사하지 않으니 경제가 잘될 수 없다. 가장 큰 병이다. 자기 생업을 팽개쳐 두고 모든 일에 간여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신건달층이 확산될수록 경제엔 마비증상이 오고 석회질화한다. 각자가 꿈을 갖고 창조적으로 열심히 일할 때 경제는 발전한다. 특히 기관차 노릇을 해야 할 엘리트층일수록 그렇다. 경제를 정말 살리려면 무엇보다 각자 생업에 충실히 종사해야 한다. 그리고 남의 영역도 존중하고 시간을 갖고 기다려 줘야 한다.

*** 카드사태 처리 보니 정말 걱정

이제까지 한국 경제는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주로 밖으로부터의 위기였기 때문에 밖이 좋아지면 저절로 풀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은 안에서 생겨 커지고 있는 문제가 많다. 혹시 이번 병이 암과 같이 치명적이 되지 않을지 걱정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약력:부산대 상대 졸업, 중앙일보 경제부장.편집국장.주필. 일본경제연구센터 특별객원연구원, 게이오대 방문연구원. 95년 삼성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