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은 뭘 하고 있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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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권의 침체·무기력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다. 나라의 방향과 대소정국을 놓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방안을 논의해야할 정치권이 정부의 개혁과 사정작업을 수수방관만 할뿐 이렇다 할 의제도 공론도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여야 모두 입으로는 개혁을 말하지만 실은 오히려 개혁대상으로 떠오르는 형편이다. 당장 슬롯머신 사건과 관련해 또 몇명의 의원들이 검찰조사를 받을 판이다. 이미 재산공개와 동화은행사건으로 큰 상처를 받았는데 다시 슬롯머신과의 검은 유착사실이 드러난다면 14대 국회가 남은 3년의 임기동안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안할 수 없게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여야 정당의 대처는 너무나 소극적·피동적이다. 상당수 의원의 이름이 슬롯머신 관련자로 소문이 난게 벌써 언제인데 각 정당은 고작 검찰통보에나 신경을 쓰고 있다. 당마다 논리위가 있고 자체 조사기구를 두고 있으면서도 수사에 앞서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처리해보려는 노력은 손톱만큼도 볼 수 없다. 검찰통보가 오면 도리가 없고 안들키면 문제가 있어도 그냥 넘어가겠다는 자세가 아닌가. 실제 지금 민자당은 당고위간부가 거액재산 은닉이 들통났는데도 옹호해주는 기색이고 민주당도 지난번 이동근의원 사건때 무조건 감싸주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여야정당의 이런 한심한 태도를 개탄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개혁적」 분발을 보이기를 촉구한다. 정부가 개혁을 다 해버리니 정치권은 할일이 없다는 사고방식은 말이 안된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다수 의원들이 정부에 대해 법과 제도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법과 제도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바로 의원들과 국회가 할 일이 아닌가. 가령 군진급 비리가 적발됐으며 그런 비리가 일어나는 구조적 원인을 따져보고 그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 법으로,제도로 정착시키는 일이 정치권의 몫이다. 또 고검장이 구속되는 검찰내부의 비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찰자체 사정기능의 강화·검사의 임용·교육문제 등을 걱정하는데 정치권은 왜 이런 문제조차 착안하지 못하는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당연히 검찰개선방안이 정치권에서 논의돼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한 의식의 혼란을 겪고 있다. 현직 고검장까지 검은 돈과 유착된 극심한 부패상을 생각하면 더욱 강력한 사정이 지속돼야 마땅하다. 반면 사정한파로 연일 자살·구속·해임·파면 등의 울적한 일이 계속되고 투자심리가 위축되면서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가느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정치권은 이런 현실은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강력한 부패의 척결과 사회의 활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다양한 논의가 정치권에서부터 활발히 일어나야 한다. 거듭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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