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3개월 편할날 없었다”/「바늘방석」에 앉은 노 전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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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주변사람몰락에도 “관련없다” 겉으론 태연/“개혁 잘하는 일”… 「광주」 문제 등엔 반응 예민
노태우 전대통령은 지금 바늘방석에 앉아있다. 퇴임하자마자 몰아닥친 사정정국은 자신을 향해 압박해 들어오고 있고 12·12,5·18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연희동 길목까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노 전대통령의 가족 중 한명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지난 2월 청와대에서 연희동으로 돌아온 후 우리 식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지난 5년간의 일이 마치 꿈속의 일같다. 긴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다」라고. 그리고 「이제 한 시민으로 돌아온만큼 오순도순 평범하게 살아가자」는 말들을 주고 받았다. 그후 3개월이 지났다. 우리의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는데,세상사람들은 반드시 그런 것같지 않다.』
지금 노 전대통령은 『현 정부의 개혁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언젠가 해야 할 개혁이었다. 그러나 내가 중책을 맡고 있던 6공초기에는 여소야대 정국 등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어오는 삭풍앞에 그의 본심이 어떤지는 물어보나 마나라는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전언이다.
이같은 처지를 딱하게 여긴 6공1기의 수석비서관출신들은 최근 「한사람이 적어도 1주일에 한번꼴로는 연희동을 방문해 말벗도 하고 그 댁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돕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또 노 전대통령 주변 일들에 관한 홍보가 취약하다고 판단해 김학준 전청와대대변인(현단국대대학원교수)에게 대변인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5년간의 꿈」에서 깨어나 연희동 사저로 돌아온 노 전대통령령에게 지난 3개월은 예상못한 악몽의 연속이었다고 볼수 밖에 없다.
우선 그의 주변인사들중 다수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처고종사촌동생인 박철언의원은 슬롯머신 사건으로 이미 사법처리가 진행중이다. 박 의원은 노대통령 초기 막강했던 시절한 때 이원조의원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인바 있다. 박 의원이 5공청산을 무기로 선공을 취하자 이 의원은 박 의원의 사생활과 자금 뒷조사로 역습을 했었다. 한 배 위에서 오와 월의 싸움을 벌였던 두사람은 함께 사정의 칼날앞에 서있다.
또 처남인 김복동의원,동서인 금진호의원도 언제 무슨 건에 이름이 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의 친인척관리는 문제가 많았음이 드러났다.
12·12와 5·18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대학생들의 연이은 집주변 시위도 그를 편치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체포선봉대」를 앞세운 대학생들의 시위는 문민정부 출범후로는 드물게 최루탄과 곤봉이 난무할 정도로 격렬했다.
노 전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민자당과도 소원해진 상태다. 그는 지난 90년 김영삼 현대통령·김종필 현민자당대표와 함께 3당합당을 감행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두 사람 모두와 서먹한 관계가 돼버렸다. 김 대통령은 거의 전임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고,김 대표마저도 인간적으로 그를 백안시한다. 특히 김 대표는 임기말에 노 전대통령이 그의 심복 이진삼 전체육부장관을 부여에 심기위해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던 일을 잊지않고 있다. 측근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같은 상황에 대한 노 전대통령의 반응은 대충 세가지로 나뉜다.
우선 원칙론이다. 그는 김영삼대통령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않으면서 『역사에 긍정적인 일』『다만 경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원만히 진행되길 바란다』고 한다. 둘째로 그는 주변 인물들의 몰락에 대해 자신은 무관하다는 분리론을 편다. 박철언·이원조의원의 혐의와 관련,측근들은 『만의 하나라도 뇌물을 받은게 사실이라면 처벌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통치자 입장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게 노 전대통령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셋째,자기 자신을 겨냥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드물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수경사령관이던 5·18당시 광주를 다녀왔다는 주장이 나온데 대해 노 전대통령은 「펄쩍 뛰었다」고 한다. 또 노소영씨 부부의 외화밀반출을 외교행낭편으로 했다는 보도에 대해선 『도대체 그런 보도가 외교관계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면서 낭설을 함부로 쓰는가』라고 역정을 냈다고 한 전직수석비서관은 말했다.
가시방석위의 노 전대통령은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역사속에 자리잡기를 바라는 것같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역사속으로 숨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고 있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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