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청와대,닫힌 관청/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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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청와대는 너무 열려 있고 관청은 너무 닫혀 있다. 대통령은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각료들은 말문을 너무 열지 않는다. 개혁의 모든 것은 오로지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각료들은 실언파문에 휩쓸리거나 주눅이 들어있다. 대통령의 뜀박질이 숨막힐 정도여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각료들이 지척거리며 앞뒤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타율에 젖어가는 관리
총리가 주요정책 결정에서 제외된다면 수장으로서의 영이 서지 않는다. 국가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통령과의 교감조차 어긋나 몇차례의 총리발언에 시비가 일었다. 정부내 회의에서도 그러했고,국회에서도 그랬다. 빈도가 잦아질수록 내각의 체통은 말이 아니다. 경제담당부총리가 「주사」로 불릴 정도로 정책 총괄부처인 경제기획원에 무게가 없고 재무부·상공부등 경제부처장관들도 입조심이 대단하다. 결코 민감한 정책들이 많아서 만은 아닐 것이다.
개혁을 경제재도약의 시기로 잡았던 관리들이 어째서 침묵하고 있는가.
대통령이 경제정책의 구체적 사항까지 「지도」한다는 선입감을 주는게 문제다. 대통령은 주요생필품 가격의 동결을 유도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실질적 동결로 나타났다. 동결에 따른 물가안정 자체가 나쁜건 아니다. 관리들은 동결 이후의 부작용에 대해 대응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임기중에 골프를 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사실상의 「골프 금지령」이 된 것처럼 임금이나 기업의 대주주 지분율에 관한 정책발언 등도 결코 수정해서는 안될 사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의 발언 톤이 너무 강하게 들려 관리들의 압박감은 가중되고 내부정책의 변화도 시도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도」가 많아질수록 청와대 측근의 입장은 강화되고 관계부처 책임자들은 수동적이 되기 십상이다. 개혁정부가 마땅히 가져야할 다이내믹한 요소들이 시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정치의 하부구조는 경제다. 경제와 관련된 대통령의 직감이 관료들의 정밀한 검토를 거쳐 현실적이고도 혁신적인 관점과 연결된다면 매우 탄탄한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제의 목표 설정이 선진국형이라 하더라도 이를 추진하는 수단이 몇년전의 그것과 다름없다면 여전히 개말도상국형 경제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과거의 대통령은 오만가지 것을 전부 지시하려고 했다. 하다못해 한국은행총재조차 조절하기 힘든 총통화를 몇% 이내로 억제하라는 희한한 지시도 있었다.
○경제는 정치하부구조
김영삼대통령이 국민과 기업의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신경제를 기필코 성공시키려면 그는 정책의 주요원칙만을 강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동기부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혁방향의 설정은 참신한 시각을 가진 주체세력들이 한다 하더라도 이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기존 관료조직을 활성화시키고 민간기업들과 수준높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어렵다. 아이디어를 내야할 주체세력들이 지나치게 연기에 열중하거나 관료들이 시큰둥해 있다면 신경제가 넘어야할 고개는 더욱 험하다.
청와대는 대통령과 만나는 모범근로자나 기업인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짜놓지 않는다. 사전에 질문순서를 정하는 구습도 없앴다. 대통령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라고 한다. 청와대 앞길이 열리고 안가가 철거된 주변에 시민공원이 마련된 것처럼 개방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그런데 관청은 왜 얼어붙는가가 문제다.
관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금품과 향응을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여러 부서에는 공직자부정방지신고센터가 설치되었다. 거기다가 여론수렴센터를 마련하기도 하고 민원인 요청사항을 녹음까지 해 명확히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곳도 있다. 기관장 사무실에는 직소민원전화 설치 경쟁이 붙었다. 거기다가 부처별 자체감사로 어수선하다. 끊임없는 비리에 대한 공동의 수치감과 자존심 붕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공무원들이 우리들 주변에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무원들의 사업장 방문이 어느새 금지되었다. 그래서 실물경제 감각이 둔해져 정책입안에 어려움을 느낀 이경식부총리가 관리들에게 기업인들을 만나고 공장도 둘러보라고 권고했지만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 청와대나 국무회의의 결정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사업장 방문은 몇년마다 한두차례씩 금지와 해제조치가 되풀이되었다.
○경직된 조직 풀어가야
우리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교대속에서 살아왔다. 제도의 개선없이 긴장만 계속되면 위기의 효과는 반감한다. 마르코스대통령 타도에 앞장 섰던 필리핀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혁명 성공후 수구세력으로 돌아서자 아시아권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이광요 전싱가포르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필리핀은 제도적 개혁이 너무 늦었다』고. 신악과 구악의 교대를 눈여겨본 우리들에게는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각 분야에 게임의 룰을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굳어진 관청의 분위기를 풀고 엘리트 관료조직부터 활성화하는 것이 좋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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