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진실(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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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역사가가 역사를 정확하게 썼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은 건축가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혼합된 콘크리트를 썼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져있는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E H 카가 케임브리지대에서 행한 연설 가운데 들어있는 말이다. 그는 또 시저가 루비콘이라는 작은 강을 건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되었음은 역사가들이 그것을 역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그 전에나 그 후에 수백만명의 다른 사람들이 루비콘강을 건넌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의 이 말은 「역사」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두가지 점을 일깨운다. 그 하나는 과거에 관한 지식의 전부가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다른 하나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객관적 사실이 역사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에 관한 그같은 관점을 우리네 현실에 대입시켜보면 어떨까. 가령 12·12사태때 동원된 사병들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했고 그후 어떤 삶을 살아오고 있는지,5·18 광주민주화운동때 진압군이나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또 12·12사태때 어떤 경로로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됐고,주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의 추인을 얻어냈는가 하는 객관적 사실들은 역사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모든 역사가 「사실」 혹은 「진실」을 바탕으로 하되 드러난 사실을 객관적으로,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나 진실 뒤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가치관을 뽑아내 그것을 재단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객관적 사실 그 자체가 역사가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에는 반드시 「정확한 진상」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역사가들의 몫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왜곡된 역사의 청산」과 「진상규명」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진상규명까지를 역사에 맡길 일은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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