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인사 종교적 용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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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81년 1월. 김대중(金大中) '피고인'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죄명은 내란음모죄.

그로부터 23년 만인 8일 오후 金전대통령은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 섰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관련된 나머지 인사 25명이 모두 무죄를 받았지만 그는 사법부의 부담을 고려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재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재판 시작 5분 전에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와 함께 법원에 도착한 金전대통령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틀 전인 6일 팔순 잔치상을 받고 활짝 웃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설훈(薛勳) 민주당 의원, 한승헌(韓勝憲) 전 감사원장 등 이미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인사들도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과거의 무도한 판결이 무효가 됨으로써 정의는 살아 있고 역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밝히는 날이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증오보다는 용서와 화해 쪽에 무게를 뒀다. "신군부 인사들을 용서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金전대통령은 "그들의 야심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원망하지 않고 마음으로나 종교적으로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탄압을 언급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金전대통령은 "당시 무슨 이유로 수사를 받는지도 몰랐다. 캄캄한 지하실에서 욕설과 고문을 당했고, 고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바로 옆방에서 함께 구금된 민주인사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였다"고 말했다.

문익환(文益煥) 목사, 언론인 송건호(宋建鎬) 씨 등 6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金전대통령은 "신군부가 타협을 제안했지만 내가 사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고 죽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것이 역사에서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선고 공판은 29일 오후 2시에 열린다.

김현경 기자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1980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조작한 사건. 金전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됐으나 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데 이어 87년 사면.복권됐다. 고(故) 문익환 목사 등 다른 관련자 25명도 당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진설명>
19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의 주동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8일 재판이 열린 서울고법 법정에 출석해 재판부가 입장하자 일어서고 있다. 작은 사진은 1980년 군사법정에서 재판받을 당시의 모습.[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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